[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02>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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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0일 03시 00분



―이경례(1962∼)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 느티나무 상호야
느티나무 독서실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슈퍼, 나무에
잎사귀 달리듯 하지만

바람의 기척에도 철렁,
가슴 쓸어내리는 꽃숭어리 잔들이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린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

가장 향기로운 한때를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


때죽나무들 저마다 향기로운 꽃 피워 올린 풍경을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란다. 도시 사람다운 표현이다. 바람이 살랑 불어 나뭇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린 칵테일 잔 모양의 꽃송이들 흔들리고, 물씬한 꽃향기에 화자는 어질어질 취한다. 눈으로도 취하고 코로도 취한다.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라니 발상이 순진하고 사랑스럽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이국풍 칵테일이 담긴 잔이다. 눈으로도 마시고 코로도 마시고, 그렇게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이란다. 때죽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 꽃송이 두 꽃송이 바람에 져 발치에도 쌓이는, ‘가장 향기로운 한때!’

나도 이렇게 흐드러지게 꽃핀 때죽나무 밑에 가서 앉아 있고 싶다. 머리 좀 쓰지 말고, 타인의 속도 들여다보지 말고, 돈 걱정도 잠시 잊고, 마냥 꽃향기에 취하고 싶다. 정서를 좀 회복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생각도 감정도 근본만 남는 것 같다. 강파르게, 뼈만 남는 것 같다. 몸이나 좀 그러면 좋으련만….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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