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살던 엘리트 청년이 있었다. 아버지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과 정무원 건설부장(국토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대학교수 겸 러시아어 번역가. 평양 남산학교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생 김평일과 함께 공부한 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그 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됐다. 그리고 1993년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 교환교수 생활….
35세 청년의 피는 거꾸로 끓어올랐다. 유학 온 학생과 교환교수들까지 노동신문 2개 면에 실린 김일성 신년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게 하는 체제, 외국학생들 보는 앞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매주 분열행진을 시키는 정권, 행여 누가 도망쳤을까 봐 오후 6시면 온 방을 이 잡듯 헤집고 돌아다니는 집단.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머리꼭지까지 화가 났다”고 한다. 반충동적으로 국제열차에 몸을 던졌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곧 홍콩’이란 방송이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내가 이래도 되나. 부모 형제 처자식은 어쩌지. 이렇게 영원히 이별하는 것인가….’ 온갖 상념이 돌고 돌아 ‘아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강펀치를 날렸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조명철(54)의 탈북 스토리다.
한국 청년들 통일의식 점점 약해져
1994년 7월 27일 서울.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거쳐 통일교육원장을 지냈고 지난해 5월에는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하는 일마다 ‘탈북자 1호’라는 이름이 붙는다.
7일 국회에서 조 의원을 만났다. 잠시 후 열릴 국회 본회의 발언 원고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8년 동안 국회에 계류 중인 북한인권법 통과를 강력히 촉구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북한인권법은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19대에서는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참 할 말이 많은 사람 같았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20분씩 쉬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말 끊기가 참 어려웠다. 한국 정착 과정은 어땠냐고 묻자 “너무 힘들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인연이 없으니 너무 외로웠다”고 했다. 주말이고 휴일이고 매일같이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경비 아저씨가 “왜 왔느냐”고 물으면 모른 척 “아차차…” 하면서 사무실로 올라가곤 했다. 자신을 이기려면 일에 파묻혀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국회의원 1년간도 “힘든 기억밖에 없었다”며 한숨이다. 경험, 지식, 능력이 부족한 데다 잡무와 민원, 행사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보람도 많았다. 앞으로도 내 하기 나름”이라며 다시 신발 끈을 조였다.
공모를 통해 통일교육원장이 된 것은 조 의원의 ‘코리안 드림’ 서막(序幕) 격. 그는 “진보정권 10년 동안의 평화위주 통일교육에 대한 반성으로 안보관, 북한관, 통일관이 균형을 이룬 통일교육을 시키라는 뜻에서 발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교육원장으로선 2012년 전년 대비 예산증가율 34%를 달성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공무원들에게 납작 엎드려도 보고 읍소(泣訴)도 해보고 협박도 해봤다”고 했다. ‘협박’ 방법을 묻자 “예산 안 주면 사퇴하겠다, 그냥은 아니고 신문에 시론(時論)을 쓴 뒤 사퇴하겠다고 했다. 좀 먹히는 것 같더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조 의원이 보기에도 한국 젊은이의 통일 의식이 약해지는 것은 큰 문제였다. 동아일보 창간 93주년 여론조사에서도 20대 청년층의 33.4%가 ‘절대 통일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 전체 평균(28.3%)보다 5.1%포인트나 높았다. 조 의원은 “더 큰 문제는 ‘귀찮은데 뭐 하러 통일하나’ ‘툭하면 도발하는, 가난한 북한과 통일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일을 위해 치러야 하는 당장의 부담보다는 통일이 되면 얻게 될 편익이 어마어마하게 더 크다는 걸 알려주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눈물이 좀 많은 것 같다”고 물어봤다. 북한 관련 기자회견 석상 등에서 감정이 북받쳐 종종 눈물이 비치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조 의원은 “나도 고민이다. 그러잖아도 병원에 가서 눈물 안 나오게 하는 약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려던 참”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이내 조 의원은 표정을 가다듬은 뒤 “북한이 나에 대한 인격살인을 하고 내 신변에 위해를 가하겠다는 위협의 강도를 높일수록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겠다는 나의 의지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자극하면 내 행동이 변화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나에 대한 테러 위협을 중단하지 않으면 북한에 대한 공격을 몇십 배 강화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동포문제, 우물쭈물해선 안돼
4일 막을 내린 10회 북한자유주간행사는 수잰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와 탈북자단체장들의 ‘북한자유주간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조 의원이 공동대표인 국회 ‘통일미래포럼’이 공동 주관했다.
“7회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하던 것을 서울에서 개최하기 시작한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동포의 인권 문제를 미국 사람들이 먼저 안타까워하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 새삼 부끄럽습니다. 주미 중국대사관,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시위를 벌였으니 이제는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 정부에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국제사회가 함께 압박하면 중국도 변합니다. 우리가 우물쭈물해선 안 됩니다.”
‘제2의 조명철’ 이야기가 나오자 조 의원은 “당연히 나와야 하고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행복한 통일, 작은 통일을 통해 큰 통일로 나아가려면 과감하게 기득권을 나눠야 합니다. 작은 통일을 위해 먼저 남한을 찾아온 탈북자들에게 기득권을 나눠 주고 장차 통일이 됐을 때 북한 주민들과도 과감하게 이익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20년 수절(守節)한 조 의원에게 최근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벗이 생겼다. ‘국수 먹는 거냐’고 묻자 “청첩장 돌리긴 좀 그렇고…”라며 멋쩍게 웃는다. 조 의원의 코리안 드림은 계속될 것 같다. ▼ 美-日도 만든 북한인권법, 우리는 8년째 국회서 낮잠 ▼
북한의 인권 상황은 국제사회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다. 미국 의회는 2004년 10월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미국은 올 1월에는 외국에서 유랑하는 탈북(脫北) 어린이들을 구호하기 위한 ‘북한어린이 복지법안’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유엔도 2005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고 있고, 인권이사회에서는 올해 3월 북한인권조사기구(COI)를 설치해 북한의 지도부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할 수 있는 길도 열었다. 유럽연합(EU)도 매년 북한인권결의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북한 내 기본적 인권의 존중 △북한 난민 문제의 인도적 해결 △대북 인도적 지원의 모니터링, 접근성, 투명성 향상 △북한 내외부의 정보흐름 촉진 △민주적 정부체제로의 평화통일 가속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2008년과 2012년 효력을 연장했다.
구체적으로는 탈북자 지원단체, 북한인권 개선 활동가, 북한 정보수집에 재정 지원을 하고, 북한으로 정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대북방송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인권담당특사 임명도 이 법에 따른 것이다. 2009년부터는 파트타임에서 상근직으로 전환해 대사급의 로버트 킹 특사가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도 2006년 6월 ‘납치 문제, 그 밖의 북조선 당국의 인권침해 문제의 대처에 관한 법률’을 발효시켰다.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보다 일본 최대의 관심사인 납북 일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압박수단이다. 골자는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최대한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선박 입항 금지와 외국환 및 외국무역법에 따른 제재도 할 수 있다.
우리 국회는 2005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북한인권법을 발의했지만 여야 간 견해차로 8년 동안 진전이 없다. 한국이 오히려 외국보다 북한인권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다. 19대 국회에는 새누리당의 윤상현, 황진하, 이인제, 조명철, 심윤조 의원이 대표 발의한 5개의 법안과 민주당 심재권 의원이 내놓은 ‘북한주민 인권증진법안’ 등 모두 6개의 관련법이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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