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씨가 이듬해 4월에 치를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됐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40대 후보 3명이 경합한 선거에서 1차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최다 득표를 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 투표까지 가 김대중 후보가 역전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언론들은 “보수야당의 전통과 체질을 감안할 때 40대의 김대중 씨를 대선후보로 지명한 것은 하나의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3선 개헌이라는 험난한 고비를 넘은 박정희 대통령(54)과 김대중 후보(47)가 맞붙은 71년 4월 27일 (7대)대통령 선거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를 구호로 내건 김대중 후보는 바람을 일으켰다. 유세에 모인 인파가 보통 10만 명이 넘었고 서울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까지 나섰다.
‘이후락 정보부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관한 보도통제였다. 차장보 등이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연일 김대중의 유창한 웅변에 쏠리는 인파가 보도에 부각되지 않도록 했다. 그 바람에 4·27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 ‘정보요원 신문사 출입금지’ ‘정보부 언론간섭 중지’를 결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박 대통령도 열심히 전국을 돌아다니며 호소했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로 갈수록 위기감이 감돌자 대통령 주변에서조차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 입후보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표를 모을 수가 없다”고 직언했다. 박 대통령은 선거 이틀 전인 71년 4월 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가진 마지막 유세에서 “야당 사람들이 ‘이번에도 박 대통령을 뽑으면 총통제를 만들어 죽을 때까지 해먹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한 번 더 뽑아 달라’는 정치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4선 불출마 선언’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미 박 대통령 마음에는 72년 유신으로 상징되는 ‘헌정중단’이라는 일대결심을 그때부터 생각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71년 봄 대학가는 개학하자마자 교과목으로 교련과목을 신설하는 것에 반기를 든 ‘교련반대운동’으로 달궈지기 시작했다. 학생 운동가들은 ‘1971년 대선’을 박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를 궤도에 올리느냐, 아니면 국민 저항에 직면해 퇴각시키느냐 하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는 해로 규정했다.
다음은 장기표 씨가 2009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꿈 나의 도전’이란 제목의 수기 중 일부다.
“71년 4월 8일이었다. 서울대 총장 시절 데모 학생들에 대한 중징계로 유명했던 유기천 교수가 형법학 강의시간에 ‘지금 박정희 정권이 군 고위 장교들을 대만에 보내 총통제를 연구시키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렇잖아도 박 정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터에 이처럼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밝혔으니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유 교수는 그날 ‘정의가 실종된 나라에서 법률 강의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더이상 강의를 하지 않았다. 유 교수의 총통제 발언은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4월 14일 서울대 상대에서는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전학련) 창립대회도 열린다. 위원장, 대변인, 중앙위원회만 있을 뿐 하부 조직은 없어 민주화투쟁을 체계적으로 지휘할 수는 없었으나 불법 부정선거를 감시하겠다며 전국적으로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해 각지로 내려 보냈다.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던 4·27 선거 결과는 박 대통령의 ‘어려운 승리’였다. 표차는 불과 94만 표. 한 달 뒤(5월 25일)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은 고전을 면치 못해 113 대 91로 백중세를 보였다.
당시 김지하는 서울을 떠나 아예 원주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71년 4월 10일 ‘명륜동 일기’라는 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노예인가? 나는 자유로운가? 어디에 얽매여 있는가? 어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지금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떠나자, 떠나야 한다. 서울을 떠나고 내 마음 속의 이 들뜬 집념을 떠나야 한다. 모든 지난날은 잊어버리자.’
‘오적’ 필화 사건으로 가는 곳마다 ‘스타’ 대접을 받던 생활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결연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정국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유증이 심했다. 무엇보다 한국 대선에서 최초로 불거져 나온 지역감정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4월 30일자 보도다.
‘이게 어디 투표야. 경상도 전라도 싸움이지, 이러다간 동한(東韓) 서한(西韓)으로 갈라지는 것 아냐. 마지막 득표상황을 지켜보던 유권자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어쩌면 민족분열의 무서운 씨앗마저 잉태할지도 모를 말초적 지역감정이 우리의 선거사상 처음으로 심각하게 노출된 것이다. 공화당은 ‘전라도 대통령을 뽑으면 경상 푸대접 내지는 보복이 온다’고 했고 신민당은 ‘이번에는 반드시 전라도에서도 대통령을 내어 푸대접을 면해야 한다’고 했다.…선거는 끝났지만 우리 앞에 제기된 문제들은 너무도 무겁고 심각하다.
정권 입장에서는 지역감정이야 지역 간의 문제라고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상 4·27 대선 후 가장 큰 문제는 비록 선거에서는 이겼지만 박 대통령이 향후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는 점에 있었다.
우선 대한민국 정치에 거대 야당과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정치 스타가 만들어지면서 집권기간 내내 그들과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내분과 무능으로 국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야당은 70년 김대중 김영삼 같은 40대 리더들로 세대교체를 이뤄내면서 상당한 지지를 받게 된다. 4·27 대선 이전까지는 학생들만 상대하면 되었던 박 정권 입장에서는 이제 제도권 권력에 정면도전하는 거대 정치세력과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훨씬 더 중대한 반대와 도전을 헤쳐 나가야 하는 출발점에 서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집권층 내부의 균열까지 시작됐다. 집권층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판사들이 대거 들고일어나는 사상 초유의 ‘사법파동’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대선에서 이긴 지 불과 3개월 만인 71년 7월 한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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