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혀는 목을 베는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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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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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목을 베는 칼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떠오른 말이다. 인턴 성추행 의혹 사건의 불씨는 ‘음주’와 ‘나쁜 손버릇’이지만 이 사건에 기름을 부은 것은 그의 ‘입’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건 후에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야반도주하듯 한국으로 오지 말고 현지에서 조사를 받고 정당한 대가를 치러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국제적 망신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국정조사까지 거론되는 정치 문제로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달게 벌을 받겠다고 머리를 숙이는 일이었다. 그의 진심이 통했다면 ‘죄(술)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일말의 동정심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를 장황하게 해명하기에 급급했다. 사건을 축소하고 핑계를 대다 보니 크고 작은 거짓말을 보탰다. 지금 그가 쏟아 낸 말들이 ‘혀 밑의 칼’이 돼 그의 목을 겨눈다. 말재주를 부리다 스스로 자빠진 꼴이다.

조선 정조시대의 문장가인 홍길주(1786∼1841)는 문집 ‘수여방필(睡餘放筆)’에서 변명과 핑계를 경계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은 일을 하다가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면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런저런 말로 변명을 한다. 죄의 무게로 따진다면 구차한 변명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죄악이 배나 더 크다.”

홍길주는 또 다른 문집 ‘수여연필(睡餘演筆)’에서 ‘세상에 나아가 자기 한 몸을 세우고 일하는’ 공인의 자세에 대해 변명의 부질없음을 예로 들어 이렇게 엄중히 충고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쥔 사람에게 그대의 일을 기록하게 한다면 단지 아무개가 어떤 일을 이러이러하게 했다고 적을 뿐이네. 방금 그대가 변명하고 둘러댄 이러저러한 말까지 잡다하게 기록에 남기지는 않네. …세상에 나아가 자기 한 몸을 세우고 일을 할 때 생각이 여기에 미친다면 역사가 자신이 한 일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될 것이네.”

이번 사건이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출범 3개월도 안 된 박근혜정부에 큰 부담을 준 것은 분명하다.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다시 잡은 책이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고전연구회 사암 지음)다. 이 책에는 앞서 소개한 홍길주 외에 정약용 안정복 이덕무 박지원 이익 최한기 등 조선 지식인들이 전하는 ‘말하기’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이들이 무슨 거창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칭찬이 지나치면 아첨에 가깝고, 비평이 지나치면 헐뜯음에 가깝다’ ‘말이 많은 집은 장맛도 나쁘다’와 같이 익히 들어온 말들의 의미를 곱씹게 해준다. 그중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퇴계 이황이 서원 유생들에게 남긴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조롱할 정도로 추악한 말’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실려 있다.

“더러운 생각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부녀자가 거처하는 장소에서도 추잡스러운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패악스럽고 방자하며 외설스러운 그 말은 차마 입으로 담을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 몸이 오싹하고 마음이 아프며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조롱할 지경이다.”

갖은 음담패설로 성희롱을 해 놓고 분위기 전환용이라 둘러대고, 엉덩이를 잡는 것과 같은 성추행을 격려와 친밀감의 표시라고 우기고 싶어 하는 분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뒤표지에 쓰여 있는 경고문. “내가 뱉은 많은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나를 죽인다.”

뜨끔하지 않은가.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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