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정국을 강타한 ‘사법파동’은 한마디로 검사가 정권에 밉보인 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이 대거 집단사표를 낸 사건이다. 언론들은 ‘국가 중대 사건’이라고 연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사건의 발단은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3부 재판장 이범렬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관 3명이 반공법 위반 항소사건을 심리하면서 출장길에 변호사로부터 왕복여비 숙식비 등 10만 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판사가 당시 정치적 분위기(?)와는 다른 판결을 내렸던 당사자였던 것.
이 판사는 1971년 1∼7월 유죄가 선고된 19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파동’ 3개월 뒤 사표를 쓰고 변호사 개업을 한 인권변호사 홍성우는 서울대 한인섭 교수와의 대담집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이 판사의 행동이 정보부나 검찰에 미운털이 박혔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나도 한번은) 집회를 주도한 학생 세 명을 선고유예로 풀어줬다. 그랬더니 검찰에서 난리가 났다. 한번은 또 독직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직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들어왔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사람을 보내 ‘구속 안 되게 해 달라’고 했다. 나는 더 심통이 나서 구속영장을 발부해 버렸다.”
당시 이 부장판사와 형제처럼 가까웠다는 홍 변호사는 “그는 아주 깔끔한 성품으로 동료 선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이 명백해 대충 타협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재판과 관련해서도 아주 강직하고 청렴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검사가 이 부장판사에게 미행까지 붙인 사실이 알려지자 판사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1차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지만 이 검사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여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사법부의 위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판사들이 동료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에 반발한 것이라고만 볼 일이 아니다. 무력한 법원의 행정부에 대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이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사법부는 기필코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여론인 것 같다. … 검찰은 이 판사가 향응을 받았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으나 사정을 알아보면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판사에게 접대를 했다는 변호사는 전직 판사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동료 관계에 있었고 대학 동창생으로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한다. 따라서 뇌물수수라기보다는 우정의 표시라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지 모른다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많은 법조인들의 해석이다.’ 사설은 이어 ‘백번 양보해 수뢰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도주 우려가 없고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일단 영장을 기각했는데 동일한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한 것은 법원에 대한 검찰의 감정적 태도’라고 했다.
2차 영장까지 다시 기각되고 재재청구가 들어오자 판사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섰다. 홍 변호사는 “다들 분에 차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법원에 대한 아주 중대한 침해다, 차라리 우리가 쥐약 먹고 죽어버리자’고 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마침내 7월 29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의 집단사표를 시작으로 하루 만에 서울민사지법 40명, 대구지법 13명, 전주지법 군산지원 10명, 서울가정법원 4명을 포함, 총 150여 명의 판사가 사표를 냈다. 전국 법관 415명 중 3분의 1 이상이 사표를 낸 것이었다.
국회에서도 난리가 났다. 법무부 장관을 불러 밤늦게까지 질의를 했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7월 30일 서울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와 서울민사지법 박승호 수석부장판사가 공동 명의로 그동안 검찰이 사법권을 얼마나 침해했는지를 조목조목 나열하는 성명서를 내자 국민들도 충격을 받았다. 성명서 내용은 이랬다.
“그동안 검찰은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판사를 용공분자로 단정, 심리적 압력을 가했으며 2. 행정부에서 관심이 있는 사건을 맡은 검사가 담당 판사에게 자신의 명맥이 달려 있다며 판결 내용을 미리 알려 달라 하고,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판사실에 도청장치까지 했으며 3. 무죄가 선고되면 판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판사의) 예금통장까지 조사했으며 4. 도청, 미행, 사찰 등을 통해 판사들을 함정 수사했고 5.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직접 판사실에 찾아와 발부를 강요했으며 6. 법원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진상조사를 하기도 전에 판사를 피의자 취급해 모욕 협박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7. 이번 (이 판사) 사건에서도 미행, 함정수사, 피의사실 공표, 영장 계속 신청 등 기존에 해온 사법부에 대한 위협을 해왔다.”
8월 2일자 동아일보는 ‘사법부를 지키자’는 제목으로 검찰을 맹비난했다.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지 어느 개인, 어느 정당을 위한 봉사자가 아니다. 검찰의 공소권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가권력이다 … 검사들은 애국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나 진정한 애국심은 어느 개인이나 정당, 정부에 대한 것이 아니며 민주주의라는 제도 그 자체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나섰다.
8월 1일 법무부 장관을 불러 판사 등에 대한 수사 중지 지시를 내리는 한편 사법부는 민복기 대법원장이 수습하도록 통보한 것이다. 결국 8월 27일 대법원장 주재하에 열린 재경 전체 법관회의에서 판사들이 사표 철회를 결의하면서 1971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사법파동은 1개월 만에 자체 수습 형식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박 정권은 파동의 주역이었던 판사들에게 가혹한 인사조치로 화답했다. 대부분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거나 좌천되자 사표를 썼다. 반면 검사들은 지방으로 전출되었다가도 1년이 채 못 되어 요직으로 복귀했다. 사법파동의 당사자였던 이 부장판사도 파동 직후인 1971년 9월 변호사 개업을 한 뒤 인권옹호 운동과 집필 등 열정적으로 일하다 64세에 작고한다.
한국의 사법부는 이후 더욱더 암흑의 터널로 들어간다. 유신정권이 출범한 후에는 아예 내놓고 정보부원들이 법원에 드나들며 상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사법파동’은 법원으로 대표되는 사법권과 검찰로 대변되는 정치권력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적 성격을 갖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집권층 내부 심장부에서 정권에 반기를 든 사건으로 기록된다. 결말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박 정권은 이번에는 최하층 민중들이 들고일어나는 또 다른 대형 사건과 맞닥뜨린다. 바로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최대 소요사태로 기록된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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