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가 노비였던 난쟁이는 서울 낙원구 행복동 무허가 주택에서 아내와 삼남매를 데리고 힘겹게 살아간다. 아내는 인쇄소 제본공장에 나가고 큰아들 영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일했지만 차남 영호와 막내딸 영희는 학업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을 철거하겠다는 철거통지서가 날아들고 며칠 후 쇠망치를 든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친다. 난쟁이 가족은 수대에 걸친 삶의 보금자리였던 집을 잃고 ‘아파트 딱지’를 손에 쥐지만 투기업자들 농간으로 입주권 값이 뛰어오르자 입주권을 팔아버린다. 하지만 전세금을 갚고 나니 남는 게 없다. 가출한 딸 영희는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어느 날 투기업자 가방 속 입주권과 돈을 갖고 행복동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난쟁이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난 뒤였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간략한 줄거리다. 1975년 처음 발표된 ‘난쏘공’은 지금까지 245쇄(2009년 현재)를 찍은 베스트셀러다.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난쏘공’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도시빈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난쏘공’이 나오기 4년 전인 71년 8월 10일 일어난 ‘광주대단지 사건’은 70년대 도시화의 곡절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언론들이 ‘민란’(동아일보 기사)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은 도시빈민들이 대거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회적 양극화를 전면에 드러낸 일이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동아일보 사회부 박기정 기자가 신동아 10월호에 쓴 ‘광주대단지’ 르포,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8·10 광주대단지 주민 항거의 배경과 사회운동사적 의미’,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논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보릿고개’를 겪으며 기아에 허덕이던 농촌 주민들은 60년대 중반부터 너도나도 서울로 향한다. 1966∼1970년 무려 60여만 명이 이농(離農)해 서울에 정착했다고 한다. 서울에 거대한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7∼1970년 총 14만598동의 판잣집이 세워졌다. 정부가 68년부터 용산역 인근 등 철도연변부터 철거를 시작하면서 70년까지 8만9692동이 강제 철거된다.
서울시는 철거 때마다 철거민들과의 잦은 충돌이 반복되자 아예 이들을 서울 외곽 수도권에 집단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경기 광주군 중부면에 약 10만5000가구, 인구 50만∼60만 명이 살 수 있는 ‘광주대단지’를 만들기로 한 구상이 나오게 된 출발점이다.
초기 구상은 나름 거창했다.
단지 안에 학교는 물론 생활편의시설을 만들고 일자리를 해결해줄 공장까지 만들어 ‘자급자족 도시’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용두동, 마장동, 청계천변 판자촌 주민 2만 가구가 시 청소차와 군용차에 의해 69년 5월부터 광주군 중부면 탄리, 단대리로 실어 날라진다. 이후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상·하왕십리 빈민들도 집과 일자리를 갖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몰려들었다.
71년 8·10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광주대단지’에는 철거민 10만여 명(2만1372가구), 전매입주자 1만4000여 명(6344가구), 기타 전입자 1만3000여 명(2950여 가구)을 포함해 총 15만∼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거대한 천막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상하수도, 전기시설은 고사하고 택지조차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아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천막들에서 나오는 오물로 악취가 넘쳤다. 빈곤과 범죄가 들끓는 그야말로 슬럼 중의 슬럼이었다.
김동춘 교수는 논문에서 “‘광주대단지 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 위원장 전성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하는 일의 중요한 부분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이었다.… 이 지역 71년 1∼6월 형사사범 4867건 가운데 폭력 1786건, 절도 927건, 사기가 543건이었다”고 전한다.
48개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날품팔이라도 하려면 서울로 오갈 수밖에 없었다. 임미리의 논문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모란단지에 이주한 하동근의 부친은 원래 서울 쌀가게 점원이었으나 광주로 이주한 뒤에도 매일 서울로 출퇴근을 하다 결국 그만두었다. 그 뒤에는 가마니를 짜서 천호동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가마니를 수레에 싣고 걸어서 갔다. 편도로 다섯 시간 이상 걸렸기 때문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단지 내에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다음은 박기정 기자의 신동아 기사다.
‘“시내에서는 지게를 져서 입에 풀칠이라도 했지만, 여기서는 지게질거리도 없다”는 당시 주민들의 푸념처럼 일곱 식구가 국수 한 봉지를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15세 딸이 허기에 지쳐 술집 접대부로 일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에 집을 나가겠다는 것을 부모가 쓰린 가슴을 안고 지켜봐야 하는 실정이었다.’
주민들의 월수입도 5000원 미만이 37%, 5000∼1만 원이 43%, 1만 원 이상이 20% 등으로 형편없었다. 또 주민들의 68%가 중졸 이하 학력 소지자였다. 학교가 없다보니 아이들이 매일 서울로 등하교를 해야 했다. 서울에 거처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 결국 학업을 중단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1971년 여름 광주대단지는 점점 서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그들만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임미리의 논문 중 한 대목이다.
‘급기야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신문사 지국에서 만 원 현상금을 걸고 ‘소스’를 캤는데 실패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밤에 시장에 나가면 쓰레기통 뒤지는 사람도 많았다.’
비참한 생활을 참다못한 일부 주민들은 입주권(딱지)을 팔고 다시 서울 무허가 지역으로 들어갔고 입주권을 갖게 된 사람들도 집을 지을 돈이 없자 다시 브로커들에게 팔았다. 막상 개발과 건설이 시작되자 토지 브로커들이 날뛰기 시작해 복덕방들만 들어섰다. 여기에 때마침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와 5월 국회의원 선거 바람을 타고 개발붐, 토지붐은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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