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의 일탈은 깃털 같은 권력에 취해 스스로 찬 완장에 무너진 것
그를 비판하던 국민이 음모론, 인턴사진에 빠지는 건 ‘국민의 완장’ 오용하는 일
국민마저 언제까지 노팬티 차림으로 있을 것인가
엄청난 스캔들의 장본인은 넋이 나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버릇이 하나 생긴다.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과 불리한 사실을 몽땅 늘어놓고 비교해 보는 버릇이다. 사실만이 아니라 온갖 여건, 분위기까지 무게를 단다. 그 짓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하는데, 할 때마다 결과가 널을 뛴다. 잘하면 살 것도 같다가, 한숨 한 번 훅 쉬는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는 시체가 된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도 그렇게 절박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자회견이라는 좋은 기회를 자해(自害)로 마감해 상황을 덧들였다. ‘그릇’의 차이 때문이다. 된 사람은 불리한 쪽을 더 근중하게 여기고, 범인(凡人)은 유리한 쪽만을 키워서 본다. 윤 씨는 후자였다. 그런데 제 논에 물을 대도 너무 심하게 대 논 자체가 망가져 버렸다.
그의 집 앞에 아직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스캔들의 종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캔들 주인공은 경험칙상 부정→저항→수용→탐구의 순으로 바뀐다. 윤 씨도 처음엔 완강히 부정했고, 기자회견으로 저항했다. 그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물의를 일으킨 자체를 인정하는(사실을 인정하는 ‘수긍’과는 다르다) 수용 단계와, 뭘 잘못했는지 철저하게 복기하는 탐구 단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국민은 이런 4단계 패턴에 익숙해 끝장을 기대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는 고용주가 준 수수한 완장을 버리고 자기 돈을 들여 뻔쩍뻔쩍하는 완장을 새로 만들어 찬, 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처럼 어쭙잖은 권력에 취했던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킬 뿐이다.
청와대는 부정과 저항까지는 윤 씨와 공범이었다. 세 불리를 느끼고 수용 단계에서 그와 갈라섰다. 홍보수석비서관, 비서실장, 대통령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한 사과가 수용의 표시이고,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문책, 공직 기강 재점검 약속은 탐구 단계까지 갔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그 후 작정하고 윤 씨 죽이기에 나섰다. 치졸한 짓이다. 청와대는 무죄가 아니라 죄를 불었을 뿐이다. 사과가 썩는 게 사과 때문이 아니라 사과상자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국민은 대형 스캔들에 어떻게 반응할까. 충격→비판→해석→감시의 단계로 옮아간다. 이번 사건은 ‘그럴 수가…’라는 충격 단계, ‘그런 놈이, 그런 놈을…’이라는 비판 단계를 지났다. 기상천외, 재기발랄한 패러디의 홍수는 비판의 꽃이다. 지금은 ‘그런데 말이지…’라며 온갖 기기묘묘한 정보를 모으고, 퍼 나르는 해석 단계의 끝물이다.
스캔들은 해석 단계에서 꼭 요동을 친다. 음모론이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수인 윤 씨가 진보 진영에 당했다거나, 청와대 내 권력게임의 희생양이 됐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나왔다. 피해 인턴의 신상털기와 미시USA의 해킹의 합리화도 뿌리는 음모론이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주장이 반복되는 것은 국민도 완장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완장은 저수지 감시원 임종술의 비닐 완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이 세다. 권력 위에 있는 유일한 세력이니까. 그래서 국민은 거악을 척결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힘센 놈을 욕보이는 것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종종 착각한다. 그런 점에선 국민의 완장은 나라를 구하는 아이언맨의 슈트와 닮았다. 그러나 아이언맨의 슈트도 악당에게 넘어가면 대통령을 납치하는 데 잘못 쓰이듯, 국민의 완장도 법과 사실, 상식 위에 군림하면 위험해진다. 5년 전의 과격한 촛불시위나 대한문 앞 화단을 짓밟는 발이 그렇다.
이 사건도 언젠가는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맡기지 말고 의식적으로라도 ‘그래, 이젠 조사결과를 지켜보자’는 ‘감시’의 단계로 넘어갔으면 싶다. 국민이 ‘충격’과 ‘비판’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는 피해 여성의 사진을 보려고 안달을 하거나 키득거려서는 곤란하다. 윤 씨가 국격에 침을 뱉었다고 하는데, 별로 향기롭지 못한 사건을 길게 즐기려는 국민도 고상하지 않다. 국민까지 마냥 노팬티 차림으로 있어서야 되겠는가.
윤 씨의 일탈을 듣자마자 퍼뜩 윤흥길 씨의 소설 ‘완장’(1983년 발표)이 떠올랐다. 그런데 작가가 4판에 쓴 서문(2011년)을 읽고 뜨끔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완장’의 줄거리는 각종 언론매체의 사설이나 칼럼 등에 뻔질나게 인용되곤 한다. …그동안 ‘완장’의 내용이 인용된 사례들을 대충 훑어볼라치면 한 가지 기현상이 눈에 띈다. 여가 야를, 야가 여를 꾸짖고 보수가 진보를, 진보가 보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하에 내 소설을 임의로 차용하는 경우 말이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명작을 남긴 작가에게 이번에도 누를 보탠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진영 논리가 아니고 작가의 창작 의도대로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윤창중의 완장)’를 통해 ‘진짜배기 거대 권력의 무자비한 속성(국민의 완장)’을 경계하기 위해 인용했으니 쪼깨 거시기하게 봐 주실랑가 모르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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