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1971년 4월 대통령선거, 5월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 광주대단지 주민들에게 융자금을 일시불로 상환하고 6월 10일까지 집을 짓지 않을 경우 땅 불하를 무효화하며, 평당 8000∼1만6000원에 땅을 사라고 독촉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도는 취득세까지 부과했다. 날품팔이 일도 없어 끼니를 굶는 사람들에게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집 마련을 향한 주민들의 희망과 기대는 좌절과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마침내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71년 7월 19일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땅값 인하, 세금 면제, 융자금 분할 상환 등을 요구하며 당국에 진정서를 넣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주민들은 8월 3일 대책위를 투쟁위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 결전의 날’로 잡았다.
9일 3만여 장의 전단이 뿌려지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서울시 성남출장소장이 서울시 본부에 있는 주택관리관에게 ‘긴급사태 발생.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이라는 SOS를 쳤을 정도였다.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오전 11시. 삼복의 열기를 씻어주는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서울시내 일선 경찰서에 비상대기령이 떨어졌다. 서울에서 차로 불과 30분 거리인 ‘광주’에서 대낮에 관공서가 불에 타고 경찰차가 화염에 휩싸이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왔기 때문이다.
성남출장소 인근 공터에 모인 주민들은 광주대단지 15만(최대 20만) 명 중 3만(최소)∼6만여(최대) 명. 이들은 “또 속았다” “배고파 못 살겠다” “영세민을 더이상 착취하지 말라”고 외치며 성남출장소와 성남경찰서 지서로 몰려갔다. 열 살짜리 철부지에서부터 칠십 노인까지 있었다. 손에 식칼 곡괭이 몽둥이를 쥔 이들의 눈은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살기가 서려 있었다. 동아일보 사회부 박기정 기자가 쓴 71년 10월호 신동아 ‘르뽀 광주대단지’ 기사 중 일부다.
‘“부숴라” “없애버려라”는 고함 소리가 들리면서 성남출장소 사무실 책상 전화기 캐비닛이 함부로 내동댕이쳐졌다. 잠시 후 “태워버려라”는 외침과 동시에 건물(100여 평)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불을 보자 군중들의 흥분은 한층 가열됐다.…(주민들은) 출장소 앞 지프차를 불태우고, 지나가던 삼륜차 두 대와 서울 시영버스, 경기차 트럭을 뺏어 플래카드를 달고 고함을 지르며 대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취재하던 보도차량도 마찬가지였다. “굶어죽게 된 마당에 신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덤벼들었다.’
도시는 무정부상태로 변했다. 다시 박 기자의 기사다.
‘경찰관들에게 뭇매를 맞아 뒷머리가 터졌다는 김정규 씨(21)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나를 때린 경찰관을 죽이겠다”고 식칼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이 와중에) 때마침 참외를 가득 실은 삼륜차가 지나갔다. 군중들이 정신없이 차에 달려들어 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참외 한 차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김모 양(12)은 “배고파 죽겠어요” 울부짖으며 자기 키보다 훨씬 큰 몽둥이를 고사리손에 힘겹게 들고 발악이나 하듯 뛰고 있었다.’
빗속에서 서로 쫓고 쫓기던 경찰과 주민들의 대치가 계속되던 오후 5시경, 양택식 서울 시장이 주민들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6시간이나 지속된 박정희 정권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빈민투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광주대단지 거리는 폭격 맞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시커멓게 타 벌렁 나자빠져있는 차량들, 경찰이 던진 최루탄 조각, 주민들이 내던진 돌조각, 깨진 유리조각, 찢어진 플래카드와 피켓, 몽둥이 자루, 주인 잃은 고무신짝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항구도시처럼 어수선한 가운데 외면상의 고요함이 찾아온 것이다.’(신동아)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명이 부상했으며 22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와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구속된 사람은 대부분이 10대 말∼20대 초 청년들이었다. 직업은 일용직 노동자와 실업자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폭동은 우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호소하거나 ‘대책을 세워 달라’며 청원하는 성격이 강했다. 한마디로 가진 자에 대한 막연한 분노, 행정당국의 속임수에 대한 분노 등이 주요 동기였다고 볼 수 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한국사회에 깊이 자리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양극화 문제를 더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근대화 작업이 촉진됨에 따라 새로운 부자가 속출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단층을 가능한 한 줄여 국민으로 하여금 일체감을 갖게 해야 하는 것이 정치적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혹시 ‘없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신동아)
성남시는 날로 비대화되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고 서울의 외곽지역을 개발하는 최초의 신도시였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정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분당 의왕 등 인근 지역에 신도시가 연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철거민들이 땅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개발이익을 분점한 사람도 많았다.
어떻든 ‘광주대단지 사건’은 철거민들 요구사항을 정부가 모두 수용하며 집단이주가 연착륙되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국이 ‘사법파동’과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김지하는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1921∼1993)와 함께 ‘또 다른 민주화 투쟁’을 도모하고 있었다. 지 주교는 가톨릭 원주교구장이었다. 한국에서 원주가 14번째(남한에서 11번째) 교구로 정해지면서 첫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지 주교는 김지하를 보자마자 “‘오적’을 쓴 시인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앞으로 같이 일하자. 우선 영세부터 받자”고 했다. 김지하는 71년 부활절,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다. 영세명은 ‘아시시의 성(聖) 프란체스코’(1182∼1226·이탈리아 가톨릭교회의 성인·프란체스코 교단의 창시자)였다.
김지하는 가톨릭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들어갔다. 거처는 주교관이었다. 폐결핵이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독사나 살모사를 고아 만든 탕제로 약을 삼았다.
그러고 몇 달 후….
이번에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원주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 중심에 김지하가 있었다. 종교계 중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 교단의 사회참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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