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위수령이 떨어져 대학가가 침묵에 들어갔다. 주요 대학에는 군 병력이 진주했다. 그렇지 않아도 쌀쌀한 날씨에 정국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서울에 머물며 몸을 숨기고 있던 김지하는 1971년 11월 초순 어느 날 명동입구 흥사단 본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 전 조영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곧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약속 장소에 조영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지하를 대신 맞은 함석헌 선생 말이 “잡혀갔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이었다. 국민들은 주모자들이 모두 ‘서울대생’이라는 것과 이들이 내란+예비+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면서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 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서울대 법대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법대 4년)과 장기표(법대 3년), 조영래를 구속했다. 김근태(상대 3년)에게는 수배령이 떨어졌다. 조영래는 당시 사법연수원생이었고 나머지 4명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된 상태였다.
검찰이 밝힌 이들의 혐의는 ‘서울 시내 대학생 3만∼5만 명을 동원해 격렬한 반정부시위를 벌이고 화염병 100여 개를 제조해 경찰에 투척하며 중앙청 및 경찰서 중요 관서를 파괴 점령해 궁극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킨다는 계획을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건은 무더기 제적과 제적 학생들에 대한 강제입영조치로 이미 초토화된 학원가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후 전개될 ‘공포 정국’을 예고하는 일종의 전조 격이기도 했다. ‘서울대생…’ 사건 발표 한 달을 채 넘기지 않은 12월 6일 박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라는 초유의 조치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사건 역시 불법연행, 고문수사, 자백강요, 정보기관의 재판간섭, 공소장을 그대로 베낀 판결문 등 당시 중요 시국 사건의 처리절차를 그대로 반복했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가 72년 12월 27일 장기표, 심재권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신범에게는 징역 2년, 조영래 피고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이 각각 선고됐다.
당시를 회고하던 김지하는 “조영래의 부재가 준 허탈과 충격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영래가 없다니…상실감이 너무 커서 한동안 얼이 빠져 지냈다. 한 사람이 옆에 있고 없다는 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더구나 조영래가 누구인가. 우리의 기둥이었고 자랑이었던 사람 아닌가.”
그러면서 평소 그의 인품이 어땠는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며 소개했다.
71년 10월 김지하가 ‘원주 시위’를 지휘하며 조영래와 긴밀한 연락을 취할 때였다. 김지하가 모든 일을 척척 완벽하게 처리하는 그에게 “조 형, 참 대단하오. 대단해”라고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조영래 답이 “안 듣겠습니다”였다. 다시 김지하가 “이 모든 일들을 어찌어찌 해나가고 있는지 말해 달라” 하자 이번에 나온 답은 “모르십시오”였다고 한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모르십시오…라. 나는 그 뒤부터 조영래를 생각할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하며 혼자 웃곤 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 조영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깐, 조영래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지하가 조영래를 “우리의 자랑이자 기둥”이라 말하며 그의 부재를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영래(90년 작고)가 누구인가.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대학입시 전국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일찍이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 아니었던가. 수석 합격자 신문 인터뷰에서 “붙으면 됐지 톱은 무슨 톱입니까”라고 한 말이 제목으로 뽑혀 입학 때부터 그는 이미 서울대 안에서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단순한 공부벌레가 아니었다. 경기고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주도하다 정학을 당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민주화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도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하게 법전을 덮고 투쟁에 나섰다.
‘서울대생…’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당시 조영래는 연수원 생활을 시작한 지 석 달째였다. 생전에 겸손한 성품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 그는 그 사건과 관련해서도 변호사 시절인 1989년 11월 12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도대체 나이 어린 대학생 4명이 무슨 수로 정부를 뒤집을 수 있었겠느냐. 또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겐 화염병 제조방법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생소했다”는 말 외에 달리 언급한 것이 없다.
조영래가 붙잡혔을 당시 정보부에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일하고 있었다. 기자는 이 전 원장으로부터 조영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수사관들이 날 보고 ‘거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군. 누구냐니까 조영래라는 거야. ‘그 사람이 왜 거물이냐’ 하니까 ‘이놈은 때릴 필요가 없다’ 이거야. 잡혀온 주제에 수사관들한테 조서를 그렇게 작성하지 말고 이렇게 작성하라고 지도를 한다는 거야(웃음).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고 자기가 했다고 하면서 말이지. 수사관들이 감복을 한 거지. 인격적으로 조영래가 이겼다면서 말이야.”
조영래는 ‘서울대생…’ 사건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한 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가 되어 긴 도피생활을 한다. 이 전 원장은 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장을 직접 찾아가 그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가게 한 주역이기도 하다. 이 전 원장 말이다.
“조영래는 리더십도 탁월했고 온화하고 겸손한 인품에 끈질기고 치밀한 성격, 비상한 머리에 글솜씨도 뛰어나고 이론에도 밝은,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흔셋에 세상을 떴으니 너무 일찍 죽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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