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중재위원회에 다녀왔습니다. 정정 또는 반론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개인이나 기관이 신청하는 절차입니다. 언론사는 피신청인이 됩니다. 양측의 의견은 중재부가 조정합니다. 판사, 변호사, 학자, 전직 언론인이 위원으로 참여합니다. 회사의 위임장을 받아서 예정 일시(22일 오후 4시 반)에 늦지 않게 도착했습니다.
준비한 자료를 들춰보는데 기사를 다루던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4월 30일, 오후 10시 50분에 이샘물 기자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러티브 문의입니다’라는 제목. 동아일보 고정코너인 내러티브 리포트를 기한 내에 출고하지 않으면 여름휴가가 없다고 엄포(?)를 놓자 아이템을 알린 겁니다. ‘고발성 내용이긴 한데 발제하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이런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첫 줄부터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국제기구의 국제망신? 유엔평화대학에서 무슨 일이…막장드라마 방불케 하는 성추행 사건, 피해 학생 도운 교수는 해임하고 학생은 퇴학 처분.’ 유엔평화대학은 제가 전부터 알던 곳이었습니다. 두세 달 전인가, 유엔평화대학 아태센터의 A 교수가 국제조약기구이자 고등교육기관이라고 강조했거든요. 국제조약기구이면서 고등교육기관이라….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믿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하길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샘물 기자의 보고는 한글로 2271자 분량이었습니다. 교수가 성추행을 했다? 크든 작든 기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명이 아니라 4명이 괴롭힘을 당했다? 작은 기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를 가르치는 대학에서 교수가 학생 4명을 성추행했다? 아주 큰 기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당혹스러웠던 점은 유엔평화대학이 뭔지를, 또 유엔평화대학의 아태센터가 국내에 설립됐음을 제게 처음 알려준 A 교수가 성추행 논란의 당사자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사가 되는지 안 되는지, 기사가 작은지 큰지를 결정하는 데는 이런 인연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습니다.
기사는 ‘학내 성추행 불거진 유엔평화대학,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제목으로 3일자에 실렸습니다. 경찰이나 검찰, 법원이나 국가인권위원회가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A1면에 안내 기사를 넣고 A5면 전체를 상보로 채운 이유는 사실관계에 자신감이 있어서였습니다. 취재 내용과 근거를 하나하나 확인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담당 기자가 아태센터에 다니는 학생이어서 기사를 쓰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점을 모두 감안했습니다.
파장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할지 외교부와 교육부에 알아봤더니 아태센터가 국제조약기구도, 고등교육기관도 아니라고 했습니다(7일자 A1·3면). 이샘물 기자도, 저도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습니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이후 아태센터는 5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홈페이지에 공지했습니다. 허위사실 및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보도로 인한 학교 위상 하락, 면학 분위기 및 명예 훼손, 행정시스템 혼란, 타 기관에 대한 손해 발생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유엔평화대학 본부는 동아일보 보도가 맞다고 알려줬고(13일자 A1면) 국가인권위원회는 교수의 행위를 성희롱이라고 인정했습니다(17일자 1·3면).
언론중재위에서 30분 정도 기다렸지만 신청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태센터는 다른 일이 많다며 불출석 의사를 전했고, A 교수는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 아태센터에 대해 기사를 썼던 국내 언론 기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정확한 실체를 모르고 좋은 점만 홍보했다는 사실 못지않게, 이 중 일부가 아태센터를 지금도 공식 비공식으로 돕는다는 사실이 저를 씁쓸하게 합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국제기구에 진출하겠다는 꿈을 가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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