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무소유 시대]<1>일본 2030 라이프스타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4일 03시 00분


“사토리 세대, 자가용 NO! 해외여행 NO! 맥주도 NO! ”

《 ‘무소유’는 이제 더이상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경제 불황에 따른 저성장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소유하지 말고 만족하며 살자”는 라이프스타일이 번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린 득도(得道)세대, 깨달음 세대라는 뜻의 ‘사토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노무라종합연구소와 공동기획으로 저성장 시대 일본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짚어봅니다. 국경을 초월해 우리나라 이야기인지 일본 이야기인지가 헛갈릴 정도로 우리와 너무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정리=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예전에는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잘되는 것이 나라의 희망이요 나의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게 사라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미나시타 기리유·여·1970년생·사회학자)

“비정규직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 시스템을 밑바닥부터 개혁해야 한다.”(우노쓰 네히로·남·1978년생·평론가)

“우리 세대의 가난은 자식 세대에까지 그대로 유전될 것만 같아 불안하다.”(고마자키 히로키·남·1979년생·회사원)

2012년 1월 1일 NHK에서 방송된 ‘젊은이가 해결한다! 일본의 딜레마’란 TV 프로그램에 나온 일본인 2030세대들의 하소연이다. 10명의 출연자는 1970∼1985년에 태어난 사람들로 교수, 연구원, 기업가, 평론가, 회사원 등 직업도 다양했다. 방청객과 프로그램 진행자도 모두 20, 30대만으로 채웠다. 이날 출연한 시부야 도모미 도쿄경제대 교수(여·1972년생)는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자식을 낳아 키울 만한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지난 10년간 ‘격차’(양극화)가 심해진 것은 기성세대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은 절대 손해보지 않기 위해 젊은이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아 구조조정 충격을 완화하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운명에 우리를 맡길 수 없다” “20대가 단결하면 나라가 바뀔 수 있다”며 동조하는 여론이 줄을 이었다. 일본 내 평론가들은 “TV 속에서 ‘세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NHK는 당초 신년 특집으로 1회만 내보낼 예정이었던 이 프로그램을 아예 한 달에 한 번씩 정규방송으로 편성했다. 지금까지 총 9회가 나갔는데 선거, 교육, 경제금융, 연금 시스템 등 사회적 현안들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불안과 답답함, 분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세대전쟁은 기성세대에서 먼저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긴 불황의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라고 주장한 것이다. 포문을 연 것은 2009년 11월 출간된 ‘혐(嫌)소비 세대에 대한 연구’라는 책. 각종 수치와 근거들을 내세우며 “버블 시대 붕괴를 경험한 젊은 세대들이 소비를 잘 하지 않아 경제 불황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각종 경제 잡지에서도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젊은 세대들이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면 ‘사고 보자’는 소비 붐이 있었는데 요즘은 이게 없어졌다”며 “소비하지 않는 젊은이들 때문에 사회에 활력이 없어졌다”고 했다.

실제로 일본 젊은이들은 돈을 안 쓴다. 아니 쓰고 싶어도 쓸 여력이 없다.

가구소득과 소비실태를 보여주는 일본 국세청의 ‘민간급여실태 통계조사’에 따르면, 30∼34세 평균 연봉이 1997년 449만 엔(약 4500만 원)에서 2010년 384만 엔(약 3900만 원)으로 떨어졌으며, 20대도 비슷한 추이를 보인다. 여기에 비정규직 비중은 꾸준히 상승해 현재 일본 내 25∼34세 직장인의 약 4분의 1이 비정규직이다. 아버지 세대가 평생 고용으로 정년을 보장받았다면, 아들 세대는 계약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앞으로 소득이 오를 것이란 희망조차 이들에게는 없다.

‘소비하지 않는 젊은이들’ 때문에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이 기업이다. 대표적인 곳이 도요타자동차. ‘굳이 차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내수 확보가 안돼 고전하고 있다.

이 회사가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는 TV 광고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인기만화 ‘도라에몽’의 주인공 노비타를 등장시키는데 스토리는 이렇다. 만화 속 소년 노비타는 30세가 됐지만 면허도 없고 차도 없다. 좋아하는 여자와 어렵사리 데이트에 성공하지만 기차를 타고 근교에 나갔다가 숲에서 길을 잃는다. ‘멋진 차’를 타고 우연히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부터 천적이었던 쓰네오. 여자친구는 결국 쓰네오의 멋진 차를 타고 노비타를 떠난다. 광고의 마지막 자막은 ‘면허를 따자. 펀 투 드라이브, 어게인(FUN TO DRIVE, AGAIN)’이다.

실제로 일본자동차공업회가 발표한 2011년도 시장동향조사에 따르면, 운전 빈도가 가장 높은 주 운전자 중 20대 비중이 1999년 16%에서 2011년에는 8%까지 떨어졌다. 같은 시기 60대 비중은 15%에서 35%로 늘었다.

최근 일본 업계는 젊은이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3대 품목으로 자동차, 해외여행, 맥주를 꼽는다. 그 외에도 TV 등 가전제품, 담배 등의 기호품도 다른 세대에 비해 일본의 20대들이 소비를 줄이는 대표적인 제품이다. 예를 들어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스마트폰 하나면 만족’이라는 인식도 늘어 굳이 다른 가전제품에 눈을 돌리지 않는 식이다.

일본 젊은이들이 이처럼 소비를 줄이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돈이 없다’는 것 말고도 다른 사회학적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선 지금 일본의 2030세대는 호황과 불황이 극단적으로 오가는 롤러코스터 경제를 목격한 세대이기 때문에 소비행위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는 분석이다. 어린 시절 풍요로움을 느끼며 자라다 어느 날, 아버지 회사가 도산을 하고, 은행이 파산하는 것을 보면서 ‘빚이라도 내 물건을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기 시작한 첫 세대라는 것이다.

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보니 아예 욕심 자체를 내지 않는 ‘신(新)무소유’ 세대가 등장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삶의 철학은 “(물질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현 상태에 만족하자”는 것이다. 최근 일본 내각부가 조사한 국민생활 여론조사는 이를 잘 반영한다. 20대의 생활만족도가 경기가 좋았던 1971년엔 48%였는데 경기가 불황인 2011년에는 오히려 65%까지 오른 것이다. 이는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기보다 ‘없이 살아도 만족하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이들을 지칭해 ‘사토리 세대’라 부른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 누리꾼이 올린 ‘1980년생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가르는 기준’이란 글이 화제가 됐다. 우선 1980년생 이전 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차를 갖고 있으면 멋지지, 그녀와 데이트 할 때는 차로 데리러 가야 해, 남자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차를 사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해, 2차로 가라오케는 가야 술자리가 마무리, 상사의 말에는 거스르지 않아야지, 잔업은 미덕.’

그렇다면 1980년생 이후 세대는 어떨까.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문제없지. 오히려 유지비가 더 들어 별로, 그녀와의 데이트는 중간 지점 지하철역에서 만나, 집은 빌려도 되지, 차라리 이사다니며 여러 곳에 살아봐서 더 좋아, 2차는 안 해도 돼,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가라오케는 오 NO! 상사도 틀릴 수가 있어, 의견이 다른 건 당연하지, 의미 없는 잔업 따위 할 필요가 없어.’

언뜻 한국에서도 최근 종영한 드라마 ‘직장의 신’이 겹쳐진다. 잔업 노, 회식 노를 외치며 비정규직 인생을 자처하고 나선 주인공의 모습에 한국 젊은이들도 공감했다. ‘직장의 신’의 원작인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이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던 때가 5년 전인 2007년. 한국 젊은이들의 5년 뒤 모습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한석주 노무라종합연구소 서울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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