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다음 달부터 하우스푸어(내집 빈곤층)의 채무조정에 들어가면 올해만 2만2000가구가 혜택을 본다. 주택담보대출 채무자가 채무조정을 신청하면 은행들은 상환조건을 ‘최장 35년간 분할상환’ 등으로 바꿔주고 연체이자와 중도상환수수료도 면제해 준다. 조정된 채무는 한국주택금융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매입하고 이를 담보로 회사채를 발행함으로써 새로운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소외계층의 자활을 유도하겠다는 박근혜정부의 대선 공약에 따라 각종 채무조정 제도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지난달 시작한 국민행복기금은 한 달 만에 11만 명이 신청했고 연말까지 50만 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올 하반기에 ‘서민금융 3종 세트’인 미소금융, 햇살론, 새희망홀씨의 연체자까지 국민행복기금의 신청대상에 포함되면 수혜자는 최대 70여만 명이 될 것이다. 이 밖에 ‘외환위기 연대보증 채무자 구제’ ‘바꿔드림론’ ‘희망모아’ 등 다양한 형태의 채무구제를 합하면 올해 수혜자만도 얼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부채 탕감책이 꼬리를 물자 ‘빚을 안 갚고 버티면 나라가 갚아준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어 큰일이다. 주택담보대출 집단대출의 장기 연체율은 2011년 3월 0.91%, 2012년 3월 1.48%였으나 올해 3월 1.92%까지 치솟았다. ‘갚겠다는 의지가 있지만 능력이 부족한 서민을 돕겠다’는 당초 취지보다 너무 나가버렸다.
현재 가계빚은 국내총생산(GDP)과 거의 맞먹는 1100조 원 정도다. 국민경제의 최대 복병으로 국가적 차원의 구제가 필요한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하우스푸어의 본질은 투자 실패다.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상환능력 이상의 대출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지만 집이라는 큰 재산을 갖고 있고, 75%가 중상위 소득계층이다. 투자 실패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한다. 이익은 사유화(私有化)하고 손해는 사회화(社會化)하는 구조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금융질서의 뿌리를 위협한다.
부채 탕감은 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성실한 채무자나 아예 빚을 쓸 기회도 없는 극빈층을 역차별하는 측면도 있다. 부채 탕감의 부담은 고스란히 은행과 공기업에 돌아가고 결국 국민 세금으로 막아야 한다. 정부는 수혜 후보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고, 이들이 집을 팔 경우 들어간 돈을 회수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차단할 방안을 단단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