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기현]民主化의 역습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0일 03시 00분


김기현 채널A 정치부 차장
김기현 채널A 정치부 차장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뜨거웠던 1980년대로 단숨에 기억을 되돌리는 ‘민주화’란 말을 뜬금없이 떠올린 건 걸그룹 멤버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시크릿의 전효성이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라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가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전효성은 “(민주화란 말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권유하는 뜻으로 쓰이는 건가’ 하고 무의식중에 받아들였다”고 해명했다.

도대체 일부 젊은층이 어떤 뜻으로 ‘민주화’란 말을 사용하는지 인터넷을 뒤져봤다. 민주주의를 절대가치로 여기며 치열한 20대를 보낸 민주화 세대인 ‘486’들에게는 낯설고 엉뚱한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심심한데 나도 민주화나 해보고 민주 인사 돼서 연금이나 타 먹을까” “민주화할 만하네” 등 존경이 아닌 조롱과 비꼼이 가득했다.

‘민주화당했다’는 말도 눈에 띄었다. 한 누리꾼은 “특정 정치 성향 사람들이 자기들만 민주적이고 민주화운동했다고 강조하는 걸 빗댄 것”이라고 나름대로 설명했다. 이런 ‘은어’들은 이미 3, 4년 전부터 인터넷과 모바일 공간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는데 기성세대만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전효성은 1989년생,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절차적 외형적 민주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철들었을 때는 이미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민주 체제의 각종 혜택이 더이상 놀라울 것도 없는,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환경이 된 이후였을 것이다. 기성세대에겐 훈장 같은 ‘민주화’가 폄훼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곳곳에서 ‘요즘 세대는 왜 이렇게 철이 없느냐’는 개탄에서부터 “젊은 세대의 역사인식이 잘못됐으니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러나 민주화란 말의 뜻이 변질되고 왜곡된 것을 ‘철없는 애들’의 일탈로만 여겨야 하는 걸까.

민주화는 우리 사회를 크게 진보시켰다. 헌법민주화 경제민주화 교육민주화 등 민주화라는 단어를 접미사처럼 어디든 붙이면 다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실망스러운 점도 적잖았다. 상당수 국민의 반감을 살 만한 사건과 현상도 있었다.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전효성이 태어나던 해 동의대사건이 일어났다. 학생시위대에 불법 감금된 동료들을 구출하려던 경찰 7명이 화염병으로 일어난 화재에 희생됐다. 시위 학생들은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아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순직 경찰의 희생은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일부 정치권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달 초 정부 차원의 첫 추도식이 열리는 데 24년이 걸렸다. 그동안 유족이 받았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고 증오를 부추기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최근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 왜곡이 대표적 사례다. 천안함 폭침사건 희생자 유족들을 향해 “북한의 소행이 아니다”라고 우기는 것도, 6·25전쟁 피해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는데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두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막말은 표현의 자유고 풍자요, 네가 하는 막말은 모욕이고 민주질서에 대한 위협”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와 진영 논리가 판을 친다.

특정 정치세력이 민주화를 전유물처럼 독점하고 누리기도 했다. 당시 386학생운동권 출신들은 대거 정치에 입문했고 청와대 정부 등 권력의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보상도 받았다. 그들이 대가를 바라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추도일에는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성역을 만들고 지나친 엄숙주의를 강요하는 태도 역시 진정한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다. 다음 세대로부터 인정받으려면 민주화 세대도 먼저 선배 세대인 산업화·근대화 세대를 존중하는 태도부터 보여야 한다. 왜곡된 민주화, 상처 주는 민주화부터 극복해야 한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민주화#전효성#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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