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무소유 시대]<2>빌려 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울지 말아요… 파티용 명품 목걸이 - 구두 빌려드려요

우리 돈으로 60만 원이 넘는 루이뷔통 목걸이. 대여 사이트인 ‘카리루’에서 5일간 4만 원가량에 빌릴 수 있다. 하루 8000원꼴이다. 카리루 홈페이지
우리 돈으로 60만 원이 넘는 루이뷔통 목걸이. 대여 사이트인 ‘카리루’에서 5일간 4만 원가량에 빌릴 수 있다. 하루 8000원꼴이다. 카리루 홈페이지
“이번 졸업식 때 안테프리마(Anteprima) 가방을 들고 갔어요. 원하던 가방을 들고 가니까 정말 자신감이 내내 들더라고요. 다음에는 프라다 구두를 착용해 보려고 합니다.”

“샤넬 목걸이 귀걸이 세트를 빌린 사람입니다. 5일간 연말연시 모임에 아주 잘하고 다녔답니다. 이번에는 진주 세트를 빌려볼까 해요.”

일본 웹사이트 카리루(Cariru·일본어로 ‘빌리다’라는 뜻)에는 각종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빌려본 여성들의 후기와 품평이 올라 있다. 카리루는 유명 브랜드 백, 구두, 옷, 액세서리를 빌려주는 렌털 서비스 업체. 에르메스 백은 5일간 9800엔(약 11만 원), 샤넬 백은 5일간 5800엔(약 7만 원)에 빌릴 수 있다. 프라다 구두는 3일간 4050엔(약 6만 원)이다.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사이트(www.cariru.jp)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한 후, 신용카드를 등록한 뒤 신분증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전송하면 끝이다.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아 자기 주소로 배송을 신청하면 된다. 대여비 외에 약 1500엔(약 1만7000원)의 왕복 배송료가 추가된다. 집으로 물건이 배송되고, 반환 날짜가 되면 택배기사가 다시 물건을 가져간다.

사이트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제품 구입을 망설이는 소비자가 시험 삼아 빌려보는 경우도 있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 ‘꼭 필요한 모임에서만 멋을 부리면 되는데 비싼 옷이나 액세서리를 살 필요가 없다’ ‘명품을 꼭 내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유행이 지나면 옷이나 가방도 잘 안 쓰게 되는데 카드 할부를 해 가면서까지 사지 않아도 된다’는 의식이 퍼졌다. 내 것이 아니지만 잠깐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물건을 잠깐 쥐었다가 다시 떠나보내는 셈이다.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신(新) 무소유 의식’의 반영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발돋움 소비’라는 말이 유행했다. 자기 소득 수준보다 한 단계 높은, 또는 훨씬 높은 고가의 제품을 사기 위해 점심을 굶어서라도 돈을 모으는 20대 여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소비자가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 버렸지만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경제용어로 ‘공유경제’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말은 로런스 레식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개인과 단체 및 기업이 갖고 있는 물건·시간·정보·공간과 같은 자원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경제활동을 말한다. 공유를 통해 자원 활용도를 높여 자원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뜻한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 2008년 탄생한 숙박시설 공유업체 ‘에어비앤비(airbnb)’가 대표적이다. 깨끗하면서도 값싸게 숙박할 곳을 찾는 사람들과 남아도는 빈 방을 빌려주려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사업 모델로, 온라인을 통해 현재 전 세계 192개국, 3만4183개 도시에서 숙박을 중계하고 있다. 하루 방문자만 100만 명, 2초에 한 번씩 예약이 들어온다. 창업 5년 만에 세계 최대 호텔체인인 힐턴을 위협하는 숙박 서비스가 등장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일본에서는 자동차를 공동 이용하는 ‘카 셰어링’ 서비스가 생성 중이다. 카 셰어링이란 말 그대로 다수의 회원이 한 대의 자동차를 공유한다. 필요할 때에 자신의 위치와 가까운 보관소에서 차를 빌려, 시간 단위로 필요한 만큼 이용하고 반납하는 서비스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렌터카 업체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편의점과 연계해 접근성과 편리성을 대폭 늘렸다. 편의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이용한 뒤, 연료를 3분의 1 정도 채워 다른 편의점에 반납하면 된다.

집도 공유한다. 혼자서 방을 빌리기에는 임차료와 보증금이 만만치 않다. 지하철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려면 월세가 천정부지로 오른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끼리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도쿄전력의 자회사 리비타(ReBITA)가 대표적. 노후화된 사택이나 단체의 기숙사 등을 예쁘게 새로 꾸민 뒤 사람들에게 빌려준다. 입주자는 독립된 개인의 방을 쓰지만, 부엌이나 거실은 공유한다. 로비에는 화이트보드가 벽에 걸려 있어, 주변의 가게 정보를 비롯해 취미 생활을 함께하기 위한 입주자들의 정보 교환 알림판 역할을 한다.

이런 구조는 독립적인 생활을 추구하지만, 외로움은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라운지나 공동 거실을 크게 만들어, 모여서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예 ‘공유경제’를 활용한 지방자치단체도 생겼다. 구마모토(熊本) 현의 곰 캐릭터 ‘구마몬’. 귀엽게 생긴 이 캐릭터는 지자체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만든 캐릭터다. 지자체는 “아무나 이 캐릭터를 가져다 써라. 로열티 없음”을 내세웠다. 그러자 개인부터 중소 상인까지 이 캐릭터를 갖다 쓰기 시작했다. 옥션에서 판매되는 컵, 앞치마, 볼펜, 연필, 접시, 열쇠고리, 휴대전화 액세서리…. 2011년 ‘구마몬’이 등장한 이래 이 캐릭터를 이용한 상품 건수만 8000건, 매출액은 지난해 한 해 동안만 293억 엔(약 3100억 원)으로 추정된다. 구마모토 현은 구마몬이 알려지면서 지역에 대한 친근감이 높아지고, 관광객도 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한국에 놀러 와 값싼 민박을 얻기 원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노는 방을 소개해 주는 ‘코자자’, 집에서 공간만 차지하는 책들을 한 군데에 모아 회원들이 서로 빌려 볼 수 있도록 한 도서공유서비스 ‘국민도서관 책꽂이’(www.bookoob.co.kr)가 대표적이다. 택배비 5000원(5권까지)을 부담하면 창고에 있는 2만 권의 책을 빌려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싶지만 권당 1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다 내기 부담스러운 독자들이 서로 책을 공유하며 읽는 셈이다.

꼭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절약하며 돈을 모으거나, 아니면 아예 사지 않고 꾹 참았던 윗세대들이 보기에 이런 현상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욕망을 절제하기보다는 공유를 통해 많은 사람이 조금씩 욕망을 맛보는 방식으로 소비 행태가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임연숙 노무라종합연구소 서울 시니어매니저   
정리=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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