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시간제 정규직, 해볼만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당신은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판명됐습니다. 당신 앞에는 두 개의 트랙(track)이 놓여 있습니다. 한쪽은 40대에 백만장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 대신 많은 걸 포기해야 합니다. 일 때문에 이혼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이나 개인의 삶을 챙기면서 평범하게 사는 길입니다. 처우 등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2000년대 중반 미국의 투자은행(IB)에서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중견 금융인이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뉴욕 월가에 진출해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 금융인에게 어느 시점이 되면 회사가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행로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설명이었다. ‘일이냐, 가정이냐’ 택할 기회를 회사가 직원에게 묻는다는 게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한국 직장인들에게 자신의 경로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기회는 많지 않다. 50대까지 회사에 남는 게 쉽지 않은 요즘 회사에서 “일과 가정 중 택하라”는 말을 듣는 회사원은 “이렇게 일하려면 그만두라”는 말로 알아듣고 밤잠을 설칠 공산이 크다. “월급이 적고 승진이 늦어도 좋으니 여유 있는 길로 가겠다”고 털어놓는 건 자해나 다름없다.

여성은 더 어렵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가 시간적, 육체적 한계에 봉착했을 때 많은 직장여성들은 가정을 희생하거나, 퇴직하거나 양자택일을 하게 된다. 일하면서 가정도 돌볼 수 있는 ‘엄마의 트랙’은 한국 직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둘을 병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공무원, 교사 직종에 젊은 여성들이 몰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가 다음주 발표할 ‘일자리 로드맵’에는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구상이 담길 예정이다. 비정규직인 ‘시간제 일자리’를 고용안정성과 처우 면에서 정규직에 준하는 반듯한 일자리로 바꾸는 게 핵심. 고학력 전업주부나 건강한 고령자들의 사회 진출을 늘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고용률 70%’를 달성하려는 계획이다.

우선 공무원부터 고용의 안정성을 대폭 높인 ‘시간제 정규직’을 뽑는다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빠지긴 했지만 고용노동부와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30일 시간제 일자리 확대와 임금체계 개편 등을 골자로 하는 노사정 일자리 협약을 맺으면서 가속도가 더 붙게 됐다.

물론 넘어야 할 벽이 한둘이 아니다. 벌써부터 야당과 민주노총은 “고용률 70% 공약을 숫자상으로 채우기 위한 꼼수” “열악한 비정규직의 수만 늘릴 조치”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부가 세제 혜택과 보조금으로 지원할 계획이지만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과 인력조정의 용이함 때문에 비정규직을 선호해온 기업들이 얼마나 반응할지도 미지수다. ‘전일제’ 근로자보다 단순한 업무를 맡는 시간제 근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이 타당한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계약직 근로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던 드라마 ‘직장의 신’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됐다. 모두가 정규직을 바라는 가운데 스스로 계약 인생을 택한 자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국내 최초의 자발적 비정규직 미스 김.” 이런 현실을 깨고 ‘정규직=좋은 것, 비정규직=나쁜 것’이라는 고용시장의 이분법을 뜯어고쳐 다양한 일자리 트랙을 제공하려는 노력은 어떤 동기에서건 환영받을 만하다.

미스 김처럼 124개 자격증을 보유하지 않아도, 회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문제를 척척 해결해낼 초인적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과 일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택할 수 있는 사회. 정부의 ‘괜찮은 시간제 일자리 확대정책’이 우리 사회를 조금은 그런 쪽으로 움직여주길 기대한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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