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질투는 나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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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라파엘로의 명작을 패러디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라파엘로의 명작을 패러디한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
콜롬비아 출신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과 조각에 등장하는 인물의 공통점은 풍만한 체구다. 요즘 잣대로 보자면 오동통한 단계를 지나 심각한 ‘과도 비만’ 범주에 들 만한 외모다. 한데 다들 당당하다. 옷을 입든 벗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적든 많든 뚱뚱한 그들이 멋지고 행복하게 보이는 이유다.

2009년 덕수궁미술관에서 보테로전이 열렸을 때 관객들은 미의 기준을 뒤집은 ‘역발상’의 작품에 매혹됐다. 살피듬이 풍성한 몸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예술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최근 질병관리본부가 전국의 중고교생 7만22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2 청소년건강행태 온라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상 체중의 여학생 35%, 남학생 22.2%가 스스로 살찐 편이라고 생각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신체 이미지 왜곡’ 비율은 높아졌다. 정상 체중임에도 스스로를 살찐 체형으로 여기는 인식은 체중 감량을 위한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체중을 줄이려고 노력한 여학생 5명 중 1명은 의사 처방 없이 살 빼는 약과 이뇨제 등을 먹고 단식 등 부적절한 방법을 사용했다. 몸짱을 추구하는 현실이 청소년 시절부터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기쁨을 빼앗은 것이다.

어른이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 영국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뚱뚱하다,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아존중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다뤘다. 체중이 각기 다른 여성들을 한 줄로 세우고 출연자에게 당신과 비슷한 몸매의 여성을 찾으라 하면 어김없이 자기보다 과체중의 여성 앞에 가서 섰다.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뚱뚱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는가. 최근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미국 비누회사의 광고를 보고 새삼 돌이켜본 질문이다. 화면 속에서 몽타주 전문가는 똑같은 여성의 초상을 두 장씩 그린다. 하나는 커튼 뒤의 여성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말만 듣고, 다른 한 장은 그들과 처음 만난 타인의 말만 듣고. 놀랍게도 두 장의 인물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자기 평가에 훨씬 야박한 설명으로 그린 몽타주보다 타인의 눈이 실제 얼굴에 더 부합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 메시지였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평론가 김현의 표현에 따르면 ‘젊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 기형도의 작품에서 다시 새겨보는 대목이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위안이니 힐링이니 하는 말이 신상품처럼 떠도는 것도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서일까. 스스로 존중하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도 안목이자 실력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페르난도 보테로#미의 기준#비만#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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