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利己로 살고 짐승은 理致로 산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 비록 미물이긴 하나
도리에 어긋남 없는 금수로부터 인간이 얻을 교훈은 없는지
서언(序言)
옳고 그름은 당사자가 깨닫는 게 최선이요, 그게 안 되면 제3자가 판단하고 당사자가 인정하는 게 차선이라. 세상 이치가 그리도 간단한데 요즘 한일 관계는 최악이니 이 무슨 조화인가. 답답함 속에 깜빡 잠이 들어 묘한 곳에 이르니 한 건물에 ‘금수회의소(禽獸會議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일본을 논박할 일’이라는 의제가 붙어 있더라. 천하다는 금수까지 인간을 꾸짖는 세상이 되매, 부끄럽고 절통하다.
개회 취지
갑자기 떠밀려 들어가 방청석에 앉아 보니 각색 길짐승, 날짐승, 물고기 등물(等物)이 빼곡하다. 회장인 듯한 한 물건이 인간의 패덕(悖德)에 대해 일장연설을 한 뒤 “천지 이치에 어긋남 없이 살고 있는 여러분이 인간보다 도리어 귀하고 높다”고 추어올린다. 이어 사람 된 자의 책임, 사람의 옳고 그름, 인류의 자격 등 세 가지가 토론할 주제라고 고하는데,
제일석(第一席), 까마귀
첫 연사는 효심 강한 까마귀. 그는 “효도는 자식 된 자가 당연히 행할 일. 우리는 이런 가법(家法)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며 가슴을 내민다. 그러면서 “인간도 옛어른을 깎아내리거나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영광은 물론이고, 부채(負債)까지도 물려받는 게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악악댄다.
제이석, 여우
여우는 “우리를 요망하고 간교하다 하나,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의 거짓말을 한 번 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여우는 “다른 집안을 능멸하고도 안 했다고 시치미를 뚝 떼고, 피해자는 무시하면서 힘센 세도가의 낯빛만 살피는 게 진짜 호가호위(狐假虎威)”라며 꼬리로 단상을 친다.
제삼석, 개구리
개구리는 자기를 업신여기면 안 된다며 펄쩍 뛴다. “우물 안 개구리와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하나, 우리는 분수를 지켜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한다. 바다를 안다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줄 모르고 동네를 활보해서야 어찌 우물 밖을 안다고 하겠는가.”
제사석, 벌
벌은 구밀복검(口蜜腹劍·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이란 말에 불만이 큰 듯 “우리 입의 꿀은 남을 꾀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요, 우리 배의 칼은 남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정당방위에 쓰는 칼일 뿐”이라며 분개한다. 이어 “꿀로 남의 것을 유혹하고 칼로 남을 공격한 사람들, 입으로는 사죄를 말하고 같은 입으로 앞서 한 말을 뒤집는 사람들에게나 그 말이 어울린다”고 일침을 놓는다.
제오석, 게
창자가 없어 무장공자(無腸公子)라는 말을 듣는 게는 “시방 세상에 옳은 창자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힐문한다. 그는 “우리는 불의를 보면 집게로 한 놈은 물고 죽고, 남의 집(구멍)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이치에 어긋난 말을 듣고도 부화뇌동하고, 들어갈 곳과 안 들어갈 곳을 구분 못해 욕을 버는 인간이 많은데 그들이야말로 무장공자라는 말을 들어야 싸다”고 게거품을 문다.
제육석, 파리
파리는 자기네를 ‘간사한 소인배’라고 깔보는 데 화를 낸다. 그는 “우리는 먹을 것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 화락(和樂)한 마음으로 함께 먹는다”며 “파리만 쫓지 말고 제발 뜬구름 같은 인기에 취해 나만 잘살면 된다는 위정자의 좁은 식견을 쫓아 달라”고 손을 싹싹 비벼대며 사정한다.
제칠석, 호랑이
호랑이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범을 길러 후환을 남긴다’는 말을 논박하는데, “덩치와 어깨만 믿는 이웃이 산속에 사는 호랑이보다 무섭고, 옛일은 무조건 잊으라고 우격다짐하는 사람이 범보다 후환이 크다”고 호통을 친다.
제팔석, 원앙
마지막에 등단한 원앙은 부부간의 믿음을 강조하면서 세상의 문란함을 질타한다. 원앙은 “하물며 미물도 의리를 지키는데, 이사 가지 못할 이웃네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면서 “한때 잘못해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기대가 있어야 새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해 박수를 받으며 회의는 끝났는데,
폐회
나는 회의 내내 이웃과 인간을 변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입도 떼지 못했으니 안타깝도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 걸 어찌 하리. 그러나 이웃의 화목과 동네의 평화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원했나니, 다음번 꿈속에서 이곳에 다시 들른다면 그때는 이웃과 인간이 좀더 나은 대접을 받기를….
(‘금수회의록’(1908년)은 안국선의 작품으로 풍자성이 강해 출판 직후 판금됐다. 작가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개화기 지식인 중 한 명. 그를 대표적 신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한 이 작품은 일본 작가의 정치소설 ‘금수회의 인류공격’(1904년)의 부분 번안물이라는 게 2년 전 밝혀졌다. 칼럼은 올 4월 ‘푸른생각’이 낸 것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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