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2>지붕 아래의 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3일 03시 00분


지붕 아래의 잠
―백현(1946∼)

언덕 위에 서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기와지붕을 인 한옥들을 본다
부신 봄볕 아래 소멸을 예감한 듯
검은 지붕들이 어둡다
기왓골에 한 뼘 넘게 풀들이 자라고
아직은 그 아래 깃든 삶을 덮어주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낙타처럼
꾸부정하게 좁은 길을 내려간다
남은 사람들도 곧 묵은 살림살이를 모아
오랜 터전을 떠날 것이다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던 빗소리와
꽃밭과 장독대가 있는 작은 마당을 두고
사막처럼 퍼져 있는 길을 지나

해가 들지 않는 공동주택에서
천장을 지나는 물소리와

벽 속에서 웅얼대는 말소리에
힘들게 뒤섞이며
영영 잃을 것이다
거친 하루를 덮어주던
지붕 아래의 잠을
그 위에 낮게 드리워진
밤하늘을

불과 한두 해 전에 지어진 고층아파트 단지와 재개발지역 끄트머리 동네 사이에는 대공사를 앞두고 허물린 집터들과 공사장이 ‘사막처럼’ 가로놓여 있을 테다. 마치 사막 가운데 섬처럼 고립된 재개발지역 끄트머리 동네. 거기에는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을 테니, 대개 오랜 거주민이 살고 있을 테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기분이 이상할까. 고샅고샅 낯익었던 골목과 집들이 돌연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산맥 같은 아파트. 그 아파트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 살리라. 지형도 완전히 달라져 골목 밖으로 나서면 문득 꿈속을 헤매는 듯할 테다. 그 꿈의 예비된 끝은 쫓기듯 동네를 떠나는 것. 재개발 끄트머리 동네도 한 집 두 집 비어가고,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만 남아 있다. 그들은 결국 어디로 가서 살게 될까? 전망 좋은 집이나 보다 넓고 안락한 집일 리가 없다. 곧 허물려 사라질 옛날 동네와 거기 남은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시선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오늘은 무주택자의 날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에세이 ‘노동의 배신’에 의하면, 가계 지출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 즉 엥겔 계수로 빈곤 정도를 측정하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란다. 오늘날에는 집세를 근거로 산출해야 한다고. 에구, 어찌나 금방 알아듣겠는 말인지!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낡은 지붕은 ‘잠 속으로 부드럽게 스미는 빗소리’를 들려준다네. 이 복락을 조금은 마음 편히, 오래 누리고 싶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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