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 갔던 곳이지만 지난달에 ‘고구려’를 다시 방문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 2012년 7월에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에서 서쪽인 마셴허(麻線河) 강가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다른 ‘지안 고구려비’를 발견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보고 싶었다.
지안 일대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國內城) 자리다. 지안은 백두산에서 뻗어온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분지로 되어 있는 넓은 도시다. 한강이나 청계천처럼 압록강을 끼고 있기도 하다. 첫 번째 도읍지는 랴오닝(遼寧) 성에 속해 있는 환런(桓仁) 시 일대로 홀본(忽本) 성이다. 오녀산이라는 험준한 산 위에 성을 구축했다. 200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활용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천지라고 불리는 연못도 있어서 장기 항전에 유리하다. 밑에서 위를 바라보면 신령스러움과 웅혼한 기상에 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추모 임금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해모수를 천제로 추앙하며 천손을 자처했다. 홀본 성을 먼저 돌아보고 국내성 쪽으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4시간 거리다.
지안 시 인근의 마셴허 지역은 1000개가 넘는 고구려 고분이 밀집된 곳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단지 중 하나다. 유적 중 ‘천추총’과 ‘서대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등도 자리 잡고 있다. 광개토대왕릉은 지름이 60여 m에 달하는 피라미드 위에 신전을 갖춘 채 웅장하게 서 있고, 장군총은 험준한 산과 압록강 사이의 터에 단단한 자태로 좌정하고 있다. 어쨌든 이 지역에서 발견된 비석이니만큼 고구려 비석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비석을 발견한 후 연구팀을 구성해서 즉시 고증에 들어갔고, 몇 달 지나서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는 높이가 170cm 정도이고, 앞면에는 218자가 새겨져 있으며, 현재까지는 150여 자가 판독되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다. 비석의 석재는 장군총을 만들었던 석재와 같다고 하며, 제작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 또는 장수왕 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발표 이후 중국은 완공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잠가두었던 새 박물관을 느닷없이 개장하면서 이 비석을 실물이라며 전시했다. 새 박물관에 도착했다.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맡겨놓아야 입장이 가능해서 그러고 직접 보니 비석은 몸체보다 훨씬 큰 유리상자 안에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는 작았고, 그나마 3m 이상 되는 거리 때문에 눈으로는 글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중국양식이라는데, 고구려다운 소박함과 기운 대신에 작위와 교만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의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공개는 하되 접근은 차단’되어 검증이 어렵게 되었다. 동북공정의 그늘이 어른거린다.
고구려는 특별하고 ‘큰’ 나라다. 영토가 광대했고, 기마군단과 수군을 활용해서 전투에 능숙했으며, 사람들의 기질도 신체도 건강했다. 수백 년 동안 중국 중원을 쟁패하며 최강 국가의 존재감을 구가했다. 자유의지와 기상, 하늘과 통하는 신기가 넘치는 미의식은 물론이고 무기 제작과 산성 축조에 적용한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모든 종족들과 교류하고 공존하는 포용력과 통솔력도 있었다. 우리 DNA에는 이런 고구려의 혼이 스며 있고 핏줄 속에는 힘찬 기상이 맥박치고 있다.
‘지안 신고구려비’는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데 발견, 해석, 연구 모두 중국에 맡겨져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등 학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한중 공동연구를 다양한 분야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민사관의 연장인 ‘반도사관’에 사로잡혀 있고, 대학입시에서조차 국사를 제외한 지 오래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를 발전시킬 모델을 제공한다. 고구려를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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