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이 노릇노릇 익었다. 잘 구워진 빵이다. 보리모개마다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알갱이가 둥글 퉁퉁하다. 바람꽃이 필 때마다 일렁일렁 어깨춤을 들썩인다. 쏴아! 쏴아! 보릿대의 몸 비비는 소리가 달곰 싹싹하다. 쓱! 쓱! 뚝배기에 된장보리밥 비비는 소리다. 아니다. 쓱싹! 쓱싹! 거청숫돌에 황새낫 가는 소리다. 꾀꾀로 먼 산의 목쉰 뻐꾸기가 지리산가리산 애처롭게 운다. 보나마나 아직 짝을 못 찾은 수컷 뻐꾹새다.
보리누름에는 모든 게 맛있다.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보리은어가 그렇다. 강바닥 자갈의 초록이끼를 먹고, 푸른 ‘이끼 똥’을 눈다. 뼈가 부드럽다. 날것 그대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상큼한 수박냄새가 입안 가득이다. 텃밭 풋고추를 그대로 따다가 물큰한 강된장에 푹 찍어 먹을 때의 그 풋풋한 맛이다. 조금 지나면 은어는 구워 먹어야 한다. 뼈가 굵은 데다 비린내가 물씬하다.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짝지근한 보리밥이다/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금이 가고 이가 빠진 황톳빛 툭사발을/끼니마다 가득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파리 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흙 묻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김준태의 ‘보리밥’에서)
그렇다. 햇보리밥이 꿀밥이다. 그 옛날, 보리밥은 으레 대소쿠리에 담아 천장에 매달았다. 시원한 대청마루나 바람 잘 통하는 뒷방 대들보가 안성맞춤이다. 소쿠리 위엔 꽃무늬 보자기를 덮었다. 큼! 큼! 코가 벌름벌름,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솔솔 흘렀다. 소쿠리 겉엔 보리밥물이 배어나와 왱왱 파리들이 꾀었다.
보릿고개(4, 5월)엔 아이들 얼굴이 누렇게 떴다. 어른들 다리엔 힘이 없었다. 아이들은 앞 다퉈 ‘보리 끄시럼’에 나섰다. 익지도 않은 청보릿대째 뽑아다가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불에 익은 풋보리를 손바닥으로 비비고 후후 불어, 말랑말랑 고소한 풋알갱이를 입에 넣었다. 저마다 입가와 코밑이 거뭇거뭇 검댕범벅이 됐다. 세상에 그런 부엌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어른들은 풋바심을 해먹었다. 여물지도 않은 보리 모가지를 댕강댕강 잘라다가 시르죽은 보리죽을 끓여 배를 채웠다.
햇보리 밥은 생명의 기운이 철철 넘친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아무리 농익어도 기세 등등 하늘을 향해 꼿꼿하다. 고슬고슬 대소쿠리 속의 ‘꽁당 보리밥’. 보리밥 알갱이는 입속에서 고무공처럼 논다. 말랑말랑 차지고, 혀끝에 탱글탱글 걸린다. 한 번 이 틈새에 숨으면 ‘못 찾겠다, 꾀꼬리’다.
‘보리밥쌈’은 온 가족이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서로 눈 흘기며 볼이 터져라 입에 밀어 넣어야 제 맛이다. 두툼 향긋한 야생 곰취, 거끌거끌 찐 호박잎, 고소하고 야들야들 삶은 양배추 잎…. 텃밭의 푸성귀 잎은 모두 다 ‘밥보자기 쌈’이다. 식구들은 뿡! 뿡! 시도 때도 없이 보리방귀를 뀌어댔다. 그때마다 마당의 닭들이 깜짝깜짝 놀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리쌀은 억세다. 한 번 살짝 삶은 뒤 찬물에 헹궈 밥을 지어야 한다. 무쇠솥이 연신 콧김을 킁킁거릴 때쯤, 솥뚜껑을 열고 그 위에 풋완두콩을 얹는다. 누렁이가 슬슬 부엌을 맴돌기 시작할 즈음이 바로 그때다.
노량으로 내려앉는 저녁 어스름, 모짝 이가 빠진 쪼글쪼글 할머니가 제비새끼처럼 입 벌리며 부니는 손자들 입에 쌈밥 넣어주느라 바쁘다. 환하게 웃는 미륵보살. 둥근 보리밥 알갱이는 어찌 그렇게 부처님 볼과 닮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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