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세 현역 아나운서 ‘가요무대’ ‘이산가족 찾기’ 진심 묻어나야 감동 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에서 내로라하는 아나운서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한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 입구서부터 TV에서 낯이 익은 여성 아나운서들이 도열해 손님을 맞았다. 원래 초청장을 50명에게 보냈지만 이름 높은 전직, 대기업 회장, 방송인, 문화예술인들이 300석 남짓한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아나운서 김동건의 방송인생 50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1963년 3월 동아방송(DBS)에 입사해 지금도 KBS의 ‘가요무대’를 진행하는 그의 나이는 75세. CNN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25년 동안 진행했던 래리 킹은 76세에 은퇴했다. ABC에서 토크쇼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바버라 월터스는 내년 85세에 현역 생활을 접는다. 한국의 방송인 중에서 이 기록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김동건 아나운서일 것이다.
그는 50년 동안 아나운서를 할 수 있는 비결로 “높은 자리가 아니어서 그렇다. 권력과 돈과 관계있는 직업이라면 누가 50년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표현이다. 70대 중반까지 방송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유혹을 이겨낸 엄격한 자기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선거 때가 되면 지명도가 높은 아나운서 출신을 징발하기를 좋아한다. 아나운서를 거쳐 정치로 진출한 이는 변웅전 박찬숙 이계진 박선영 박영선 한선교 유정현 씨 등이 있다. 김 씨는 정치 쪽에서 여러 차례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싫었다기보다 아나운서가 좋았다. 아나운서와 정치 사이에도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가 있다. 그가 정치로 나갔더라면 방송 인생 50년은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교수 자리도 몇 번 사양했다.
김동건의 방송인생 50년 축하 잔치는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자리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선후배들이 자발적으로 축하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는 김병찬 서울종합예술대 교수(전 KBS 아나운서)는 선배 집에 선물을 사들고 찾아가면 꼭 더 큰 선물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고 술회했다. 흔히 계급장이 높을 때 사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자리에서 물러나면 쓸쓸해진다. 김동건은 계급장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50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더 빛이 났을 것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밥 살 돈을 아꼈더라도 빌딩을 사지는 못했을 것이고, 밥 좀 샀다고 해서 거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잘하는 요령에 관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정중하게 사양한다. 말을 잘하는 재주는 타고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누구나 별 노력 없이 말을 잘하면 아나운서가 어떻게 먹고살겠느냐는 조크도 빼놓지 않는다. 그래도 한마디 해보라고 조르면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방송을 할 때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진심으로 전력투구해 들어주면 초대 손님이 진심을 느끼고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질문이 좋다고 반드시 좋은 답변을 끌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행자가 열심히 들어주지 않는데 누가 이야기할 흥이 나겠습니까.” 그가 생각하는 말 잘하는 사람은 남이 이야기할 때 진지하게 들어주면서 간간 거들다가 말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절제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가수 조영남과 김동건은 같은 황해도 출신이다. 이날 조영남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시작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불렀다. 향수도 실향민 가수가 불러야 제맛이 난다. 김동건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6·25 때 행방불명됐다. 그는 사리원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한 번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 김동건이 1983년 진행한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지금도 국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실향민 아나운서의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에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참석자 중 단 두 명이 축사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한 사람은 김동건의 연세대 스승인 김동길 교수였다. 김 교수는 그에게 에이브러햄 링컨의 삶과 워즈워스의 ‘무지개’란 시를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소개했다. DBS의 아나운서였던 전영우 씨는 그에게 혹독한 도제교육을 시켰다. DBS 아나운서실장을 지낸 전 씨는 스피치개론(1964) 국어화법론(1987) 표준한국어발음사전(1992) 같은 책을 펴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전 씨로부터 꾸지람을 들으며 품위 있는 방송언어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살아가는 길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스승을 갖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방송에서는 초대 손님이 주연이고 진행자는 주연을 빛나게 하는 조연이라고 말한다. 김동건 아나운서의 방송인생 50년은 그 어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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