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사채, 국민 돈으로 갚아주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7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2>8·3조치 1

1972년 8월 3일 ‘8·3 사채동결조치‘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는 경제부처 장관들. 왼쪽부터 당시 남덕우 재무부 장관,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이낙선 상공부 장관.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1972년 8월 3일 ‘8·3 사채동결조치‘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는 경제부처 장관들. 왼쪽부터 당시 남덕우 재무부 장관,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이낙선 상공부 장관.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온 뒤 한 달 가까이 지난 1972년 8월 2일 오후 11시 40분경.

장대 같은 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 시간,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주재로 심야 임시 국무회의가 열린다. 군사작전처럼 비밀리에 마련되어 8월 3일 0시를 기해 발포된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의결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쇼크요법인 이름하여 ‘8·3 사채동결 조치’였다.

‘8·3조치’는 8월 9일까지 사채를 신고할 경우 월 1.35%라는 파격적인 금리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동결하고 2000억 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장기저리 자금으로 단기 대출의 30%를 장기 대출로 전환하게 하는 것 등이 핵심이었다. 금융기관은 신용보증기금을 설치하고 일반 대출금리를 연 19%에서 15.5%로 내리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갑자기 빚을 동결해주고 금리도 내려준다니 빚을 낸 기업 입장에서는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3, 4일간은 신고가 거의 없었다. 혹시라도 신고를 하면 자금출처 조사나 내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청와대가 일체의 불이익이 없음을 확약하고 세무서별로 신고 실적을 체크하기 시작하자 세무 공무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실적 올리기에 나섰다. 신고 마지막 날인 8월 9일에는 기업들도 사채업자들도 다투어 세무서로 몰려들었다.

오후 6시 마감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신고 사채가 총 4만677건, 3456억 원이나 된 것이다. 8·3조치를 주관했던 당시 남덕우 재무장관이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밝힌 내용이다.

‘청와대와 재무부는 긴장 상태에서 사채 신고사항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과 함께한 자리에서 사채 신고액 알아맞히기를 했다. 내가 200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자 박 대통령은 3000억 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9일 집계액이 나왔는데…나는 예측이 빗나가 무색할 따름이었다.’

당초 전경련이 추산한 금액도 1800억 원 정도였으니 정부도 재계도 국민들도 모두 다 깜짝 놀랐다. 신고 사채 총액이 통화량의 약 80%를 넘는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렇다면, 당시 기업들은 왜 이렇게 사채를 많이 끌어다 썼을까. 다름 아닌 불모지대나 다름없었던 척박한 금융시장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금융시장은 증권시장이 투기장이 되어 있었고 은행 등 제1금융권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지하경제만 과도하게 발달한 형국이었다. 은행은 자체적으로 심사한 사업계획이나 신용평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결정에 따라 대규모 대출이나 정책자금 대출을 해주는 게 다반사였다. 은행이 자체적 신용창출을 하는 근대적 의미의 금융기관이라기보다 경제 개발을 위한 내자 조달에 동원되는 ‘정부 자금의 중개 통로’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엔 수출 제일주의 정책이라는 당시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박 대통령은 임기 내내 ‘수출을 종교’라고 생각할 정도로 경제정책의 중심을 수출에 걸었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환율을 올리고 수출용 원자재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수출 잘하는 기업에 장려금을 주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1970년,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나는 법.

시중 금리가 연 30∼40%대였던 시대에 수출에 필요하다고 하면 금리를 3분의 1로 깎아주었으니 정치권과 연줄이 있는 사람이 은행의 저금리 대출을 받는 정경유착으로 이어졌다. 이들 중에는 수출한다고 너도나도 돈을 빌려놓고 돈놀이나 부동산 투기를 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돈은 속성상 조금이라도 금리를 더 높게 주는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돈을 맡기려는 사람은 높은 이자 때문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은행보다 훨씬 쉬운 신용으로 빌릴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사채시장으로 돈이 계속 몰렸다. 일반 중산층 가계도 여윳돈이 생기면 사채시장에 내놓아 이자를 받으려 했다. 심지어 월급을 받아 다시 자기 회사에 빌려주는 종업원들도 흔했다.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빚을 내 기업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지만 잘 돌아가지 않을 때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그전까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 경제는 1970년대 초반 세계경기 불황이라는 혹독한 시련과 마주한다. 1969년 13.8%였던 성장률은 1970년 7.6%, 1971년 8.8%, 1972년에는 5.7%로 크게 떨어진다.

경제 불황의 신호탄은 한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에서부터 왔다. 1971년 8월 15일 저녁 닉슨 대통령은 특별생방송을 통해 미국 정부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금으로 바꿔주던 달러의 금태환 정책을 포기하고 달러 약세를 용인한다는 ‘미 달러화 긴급방위조치’를 발표한다. 1944년 이후 약 30년간을 지탱했던 세계 통화질서, 브레턴우즈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다.

책 ‘코리안 미러클’(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에 소개된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을 요약한다.

“1969년부터 미국 경제가 하락하면서 세계적인 불황으로 이어졌다.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단 선언은 달러의 평가절하를 단행한 것이었다. 미국은 재정을 긴축하고 외국 원조를 줄이는 등 우리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 시장만 바라보고 차관까지 들여와 사업을 하던 한국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미국이 기침을 시작하자 한국은 독감에 걸려버렸다. 수출이 줄고 내수가 부진해지자 가뜩이나 고리 사채의 늪에 빠져 재무구조가 취약했던 기업 부실이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 된 것이었다. 1969년에 이미 청와대가 부실 차관 업체를 무더기로 한 번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목은 점점 조여 오고 있었다. 69년 5월 83개 업체 중 45%가 부실 기업체로 분류됐다.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대통령을 수차례 만나 획기적인 구제조치를 해달라고 사정했다. 결국 1년 동안의 준비작업을 거친 끝에 획기적인 조치가 발표되기에 이른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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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사채#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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