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리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들떴다. 그러나 2개월도 안 된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한다.
“조국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발표하겠다”며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2000년 신동아 4월호가 공개한 미국의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밀 해제되기 시작한 국무부 비밀 전문에는 유신 전후의 긴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는 10월 유신 하루 전인 10월 16일, 두 차례로 나누어 총 12장 분량인 장문의 비밀 전문을 국무부 장관에게 타전한다. ‘한국의 비상계엄령 선포와 정부 변화 계획’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비밀 전문은 주일 미국 대사에게도 동시에 전송되었다. 미 국무부는 전문 입수 후 즉각 미 국방장관과 하와이의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에게 전송했다. 다음은 전문의 앞머리이다.
‘김종필 국무총리가 10월 16일 18:00시에 10월 17일 19:00시를 기해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고 통보함. 동시에 한국 정부는 현행 헌법에 대한 주요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며, 이를 통해 대대적인 정부 구조 개편 작업을 실시할 것임. 계엄령 발효와 더불어 국회는 해산될 것이며, 정치 활동도 중단됨.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이 공고되고, 이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11월 21일 실시될 것임. 개정안의 아주 구체적인 사안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선거단 구성이 포함될 것임.’
하비브 대사는 두 번째 전문에 김종필 총리로부터 계엄령 선포를 통보받는 과정을 간략하게 적었다.
‘10월 16일 18:00시에 김 총리 사무실을 방문했음.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면서, 계엄령 선포를 통보했음. 김 총리는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미국 측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라고 믿어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이튿날인 1972년 10월 17일,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이미 1년 전 비상사태 선포로 숨죽이며 살고 있던 국민들은 오히려 담담하게 유신을 맞았다. 이철 전 의원은 2012년 10월 1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로부터 꼭 40년 전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제대하고 막 복학했을 때였다.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 정문 근처에서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종로5가 쪽에서 탱크 소리가 났다. 우리 때는 박정희 정권이 필요하면 수시로 군대를 동원했기에 참 익숙한 소리였다. 그래도 ‘무슨 탱크인가’ 해서 달려가 보니 한 대는 서울대 쪽으로, 한 대는 광화문 쪽으로 계속 달렸다. 학교 앞에 멈춘 탱크는 (북한이 아닌) 시민들을 향해 포구를 겨눴다. 그게 유신의 시작이었다.”
유신이 선포된 다음 날인 10월 18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울의 거리는 다른 날처럼 출근길 시민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리에 계엄군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전날과 달랐을 뿐이다. 계엄령이 선포되던 17일 밤 서울 시청 앞과 국회의사당 앞길도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시민들은 국회의사당과 시청 앞에 나온 계엄군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흥가인 무교동에는 전과 다름없이 인파가 붐볐으나 간혹 삼삼오오 모여 무엇인가 궁금한 듯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대학은 휴교에 들어가고 모든 신문과 통신은 사전 검열을 받게 되었다. 남북 화해무드를 한꺼번에 얼게 하는 공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은 언론은 계엄군이 대학에 진주했다는 보도는커녕 대한민국 전체가 비상계엄하에 있다는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조차 보도할 수 없었다. 언론은 그야말로 암흑의 터널로 들어갔다.
4·19혁명으로 자유를 누려온 한국의 언론은 5·16 군사정변으로 어둠의 시절을 맞긴 했지만 때로는 혼연일치가 되어 또 때로는 내분을 겪어가며 독재의 압력에 맞섰다. 폭행, 고문, 해고를 감수하고 투쟁했으며 남아 있는 기자들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분투했다. 71년 4월 15일에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을 시작으로 전국 기자들의 선언이 뒤를 잇는 ‘제1차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때 중단된 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은 유신 선포로 다시 시작됐다. 10월 17일 정부 각 부처 기자실이 폐쇄됐고 18일엔 경찰서 기자실마저 문을 닫았다. 기자들은 갈 곳이 없어졌고 취재원 접근도 원천 봉쇄됐다. 유신 초기 사회부 기자였던 동아일보 정구종 기자(동서대 석좌교수·일본연구센터 소장)의 회고다.
‘유신 발표 당시 동대문경찰서 출입기자였다. 유신과 함께 기자실이 문을 닫자 아침에는 창경원에 모였고 낮엔 경찰서 외곽을 돌았다. …하루는 “기독교회관에서 목사들의 집회가 있으니 취재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달려갔다. 이해학 목사 등 10여 명의 젊은 성직자들이 ‘유신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현장이었다. (타사 기자) 모두들 회사에 전화보고는 했으나 어느 신문·방송도 싣지는 못했다. 그날 오후 동대문경찰서 정보과장이 기자실로 모여 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다들 모이자 “오늘 기독교회관의 취재 관계로 중앙정보부에서 기자들을 만나자고 한다. 내 차에 타고 가보자”고 했다. 반강제연행 식으로 모두들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수사과로 실려 갔다. 그러고는 밤새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옆방에는 목사들이 이미 연행돼 와 밤새 구타당하며 취조 받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
기자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간단했다. 목사들의 유신 반대성명 내용을 회사에 전화로 알림으로써 ‘유신헌법 반대 의견을 타인에게 고지·전달’해 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의 말이다.
‘정보부는 밤을 새운 조사와 조서 작성, 범죄인 도표 작성 등으로 겁을 준 뒤 새벽에서야 취재기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다시는 유신 반대 관련 취재를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은 뒤였다. 말하자면 유신체제를 왈가왈부하는 어떤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협박과 공갈을 하기 위한 일막극이었다. 물론 그 같은 전말은 신문·방송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젊은 기자들의 허탈함과 불만은 안팎으로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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