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김정은과 세트장, 그리고 용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1일 03시 00분


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지난해 8월 김정은이 낡은 목선을 타고 연평도에서 수 km 떨어진 무도에 나타났을 때 기자는 그가 섬 주둔 병사들과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주목했다.

사진 속에는 목이 가느다랗고 눈이 움푹 들어간, 얼핏 봐도 심한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 확연한 앳된 병사가 여럿 보였다. 김정은 옆에 선 병사는 키가 150cm도 안 돼 보였다.

김정일 시대엔 상상할 수 없었던 사진이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한다면서 수시로 군부대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가 방문하는 부대는 몇 달 전부터 열심히 꾸며놓은 세트장이었다. 기자 역시 북한에 있을 때 어느 부대의 진지 경관 공사에 동원된 적이 있다. 김정일은 몇 달 뒤 이 부대를 방문해 잘 꾸며놓았다고 칭찬했다. 김정일이 찾는 부대의 영양실조 환자들은 건장한 병사들로 교체됐다. 시찰 코스에 의례적으로 포함되는 부대 식당엔 전체 군단이 달라붙어 채워놓은 육류와 산나물 같은 부식물이 늘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모든 정보를 독차지한 김정일이 이런 내막을 몰랐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김정일에겐 현실을 마주할 용기도, 이를 극복할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현지시찰이란 체제유지를 위한 쇼였을 뿐이었고, 연기를 위해선 세트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정은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 김일성의 1940∼1960년대 스타일을 열심히 학습해 모방했다. 그러니 당시의 김일성은 세트장은 찾아다니지 않았음도 잘 알 것이다. 김일성은 한 농장에서 보름 넘게 지내며 현실을 파악했고, 낡은 초가집에서 잠도 잤다.

허름한 목선을 타고 영양실조 군인들과 사진을 찍은 모습을 보며 나는 김정은에게 기대를 걸어보려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후 사진에선 영양실조 환자들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금 아첨쟁이들이 준비한 세트장에서 웃고 있었다. 집권 1년 반이 지났건만 그는 북한에서 가장 경제 상황이 열악한 함흥 이북은 아직 찾지도 않았다.

지도자에겐 현실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해도. 고난과 시련의 현실은 영웅의 탄생을 준비하는 세트장이 될 수도 있다.

1960년대 누구도 한국에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을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찾아가 “선배님,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한 종자돈을 얻어왔다. 누구도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굴하다 하지 않는다.

김정은이 세트장을 벗어난다면 절반은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기차역이나 장마당에 불시에 가 봐도 좋다. 그에게 인민을 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느 현실도 그에게 결단의 용기를 주겠기에.

북한의 전격 제안으로 내일 남북당국 간 회담이 서울에서 열린다. 기자는 이번 회담에서 김정은의 용기를 찾아보고 싶다.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현실#영양실조#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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