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6월 8일자 표지모델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함께한 모습이었다. 6월 7일과 8일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 맞춰 게재된 것이었다. 동성애를 그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패러디한, 한가로운 목장에서 카우보이모자를 쓴 채 밝게 웃는 두 사람의 패러디 사진은 미중 양국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12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난 황병태 전 주중국 대사(78)는 이코노미스트의 표지를 보여주면서 “중국이 경제대국의 지위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으로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최근 열린 미중 정상회담과 27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그가 말하는 ‘중국’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는 대사로 지낼 때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영원한 주중대사’로 불릴 정도로 중국 지도부와 각별했다. 이번에 방한한 탕자쉬안(唐家璇) 전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도 특별히 따로 만남을 청할 정도로 늘 연락하고 있다. 황 전 대사는 최근에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 주목한 ‘침몰하는 자본주의’(IBL)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인터뷰는 책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서구자본주의 대안은 중국국가자본주의
―책을 보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대안이라고 보는 것 같다.
“세계 경제가 성장이 멈춰 있고 소득 불균형으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자본주의가 끝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201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앨빈 로스조차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세계 경제니 하는 것에 대해 묻지 말아 달라’고 말했을 정도다. 2008년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가진 모임은 또 어땠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금융위기 쓰나미로 전 세계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는데 경제학자들은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화두를 던졌지만 현장은 침묵이 지배했다. 작금의 경제학은 경제학이 아니라 ‘금융공학’이다. 이익에만 탐닉하다 보면 결국 1% 대 99%의 대립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현재 서구 자본주의는 자본 수익이 전부다. 자본 수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사유화하는 것, 그것이 최고 가치다. 그런데 실제 처한 모습은 어떤가. 미국 자본주의는 재정은 악화일로에 있고 많은 사람이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도전을 받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내부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 경제에는 ‘사람’이 빠져 있다. 나는 이런 문제에 빠진 현재 서구 자본주의의 대안이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주목하는가.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정치체제이지만 경제 제도와 경제 운용은 영구 임대 소유 토지제도와 주택 소유제도만 빼고 나머지 부문은 자본주의적 개인 소유 체제가 돼 있다. 시장경제 위에 공산 정치를 얹어 놓은 것이다.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회주의 정치와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가 공존하는 특수한 구조물이지만 실제 경제 운용은 자본주의 질서의 틀 안에서 진행된다. 서구 자본주의도 소득 격차의 궁지에 빠져 있는데, 이 격차 해소가 시장의 자율질서 속에서 이뤄지지 못할 때 정부가 개입한다.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경제 자본주의와 정치 사회주의의 결합물인 만큼 이것이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온다는 것인가.
“서로 다른 정치 질서를 가진 두 개의 자본주의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역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서구 자본주의와 여러모로 구별되는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 식의 자본주의로 중국 시스템을 발전시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당 지배의 정치와 자유주의 경제를 혼합한 리콴유의 정치·경제 체제는 전 세계적으로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싱가포르는 모범적 선진국으로 꼽히지 않는가.”
황 전 대사는 중국의 정치 시스템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국내 정치 시스템과도 비교했다.
“중국 공산당은 그냥 공산당이 아니라 아주 특이한 공산당이다. 10년 단위로 지도자를 바꾸고, 통치권을 지도자 한 사람에게만 주지 않고 집단지도 체제를 유지한다. 일당 독재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공개적인 권력 구조를 통해 국민적 동의를 끌어내고 있다. 지금 중국 공산당 당원이 무려 8000만 명이다. 이들도 우수한 인재들인데 여기서 뽑고 뽑아 지도부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17, 18세 때 당원이 되어 업적을 쌓아가면서 올라간다. 시진핑도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 아닌가. 이러니 중국 국민들은 공산당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중국을 이만한 나라로 만든 게 공산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어떤가. 선거 때만 재래시장 돌아다니면서 서민들과 악수한다. 그런 걸로 국민들이 공감하겠나. 정치가로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국민이 납득하고 동의할 만해야 한다.”
화제를 최근 미중 정상회담으로 돌렸다.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이 변하고 있다. 중국은 10여 년 전만 해도 담을 쌓고 ‘개구멍’으로 바깥세상을 봤다. 자기가 필요한 것만 본 거다. 그만큼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개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오바마와 만난 시진핑은 개구멍을 뚫고 대문을 열고 나온 중국의 상징이다. 시진핑이라는 사람 자체가 개방적 도시인 상하이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해서 개방적 성향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북한, 하루아침에 허허벌판 내몰려
―차이메리카(차이나+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중국 파워가 막강해졌다.
“지난 세기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팍스 차이메리카나’의 시대가 될 것이다. 중국이 하루아침에 강국이 된 게 아니다. 그간 축적된 경제적 부가 바탕이 된 거다. 경제 대국이 됐고 이제는 세계적인 정치 파워를 가지려 하고 있다. 내가 주중 대사(1993∼95년)로 일할 때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한국과 중국이 전자, 통신, 비행기, 원자력 등 4개 분야 산업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개발, 생산해서 판매하는 한중산업협력을 하자고 제안해 양국의 경제부처와 장관들을 설득하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체결이 됐다. 그런데 내가 임기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사업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과를 내지 못해 아쉽다.”
―중국이 ‘담을 허물고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불과 몇 달 새에 북한과 중국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북한은 중국과 함께 개구멍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이라는) 지붕이 무너진 격이다. 시진핑 시대를 ‘뉴 차이나’라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중국이 선포되면서 수십 년 동안 공고했던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달라지게 됐다. 북한은 하루아침에 허허벌판에 내몰린 것이다. 더욱이 북한의 최근 도발에 우리 정부가 꿈쩍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60년간 선군정치를 기본으로 한반도에서 미군을 핵무기로 몰아내고 남한을 접수하자는 기본 패턴이 무너진 상황이다.”
―중국의 변화가 남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북한은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상황이 악화되다 보면 이판사판으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 비핵화 의지가 단호한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비핵화 논의는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향을 전환해 북한을 ‘제2의 미얀마’로 이끌어야 한다. 새로운 살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개혁·개방을 가속화하고 있는 미얀마처럼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북한에 ‘미얀마의 길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거듭 보내고 있지 않나.”
―이번에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의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남북관계를 풀) 절호의 찬스이다. 북한을 제2의 미얀마로 이끄는 열쇠는 시 주석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까지 북한에 대해 우리가 취했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은 과거 패러다임의 연장이다. 북한을 견제할 게 아니라 중국과 함께 북한에 출구를 만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김정은 체제의 개혁·개방 움직임을 중국이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대중(對中) 외교의 중심이 돼야 한다.”
현실적인 ‘제2의 미얀마’ 길 제안해야
그는 “시 주석이 박 대통령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도 중요한 요소”라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북한 카드를 버릴 수도 없고, 미국이 북한 때문에 한반도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도 중국 입장에서는 껄끄럽다. 박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북한이 걸을 수 있는 ‘제2 미얀마’의 길을 제안하고 이에 대해 서로 교감하면 북한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큰 프로젝트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크게 호감을 갖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도 경제개발 전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정책이 모델이 됐다. 그런 만큼 박근혜 대통령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용이할 것으로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썼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외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해야 한다.”
―최근 중국의 태도 변화와 맞물려 남북 회담에서 의미 있는 논의가 오갈 것으로 기대됐는데 무산됐다.
“북한은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동생이 형을 따르듯 의존했지만 이제는 거리가 생겨버렸다. 이런 한편으로 북한에게 남한은 ‘공작’의 대상이지, 외교의 대상이 아니다. 남북회담이 무산된 것도 그런 ‘공작’의 연장선으로 본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공작’의 방식이 더이상 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행정학 석사, 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기획원 공공차관과장, 경제협력국장, 차관보를 역임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데 일조한 대표적 경제 관료다. 13, 15대 국회의원, 주중대사, 한국외국어대 총장, 대구한의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정계와 관계 학계 경험도 두루 많은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하며 오전 6시에 일어나 중국 일본 잡지와 신문 등을 꼼꼼히 읽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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