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도쿄에서 납치… 바다에 수장될 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0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1>DJ 납치 1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 만에 동교동 집으로 돌아온 김대중 씨가 1973년 8월 13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피랍 닷새’ 동안의 일을 설명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동아일보DB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 만에 동교동 집으로 돌아온 김대중 씨가 1973년 8월 13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피랍 닷새’ 동안의 일을 설명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동아일보DB
1973년 7월 3일 오후 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 준공식으로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70년 4월 1일 첫 삽을 뜬 이후 3년여 만에 연산 조강능력 103만 t 규모로 동남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일관제철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비로소 경제도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다들 기뻐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준공식이 있은 지 불과 한 달여 지난 8월 8일 국내는 물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DJ가 납치된 것이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1971년 4·27 대통령선거에서 불과 94만 표 차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惜敗)한 DJ는 대선이 끝난 직후인 71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신병 치료차 도쿄를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72년 10월 유신 선포도 일본에서 들었다. 그는 절망에 빠진다.

‘이국땅 호텔방을 서성거렸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어떤 심정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인가…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분노였다.’(‘김대중 자서전’)

서슬 퍼런 독재에 가위눌려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 그는 아예 망명을 결심하고 나라 밖에서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기로 한다. 유신 선포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 행위는 위대한 한국민의 손에 의해 반드시 실패하리라 확신한다’는 성명을 낸 데 이어 11월 3일자 주간 아사히에 ‘한국 계엄령에 직언한다’는 글을 쓴 것을 시작으로 일본 언론들에 연달아 기고를 하고 인터뷰도 했다. 또 미국으로 날아가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아예 반독재투쟁을 이끌 해외 구심체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한민통)를 세우기로 하고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미국 본부 발기인 대회까지 마친다. 그리고 7월 10일 일본 본부 결성을 위해 도쿄로 돌아와 8월 15일 있을 창립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오후 도쿄의 날씨는 덥고 습했다.(‘김대중 자서전’)

DJ는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 머물고 있던 민주통일당 양일동 총재 방(2211호)에서 같은 당 김경인 의원과 셋이 점심을 먹고 다음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김 의원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튀어나오더니 DJ의 멱살을 잡고 양 총재 옆방으로 끌고 갔다. 닷새에 걸친 ‘지옥’의 시작이었다.

도쿄에서 사라진 DJ는 5일 만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집으로 걸어 들어와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한다. 다음은 DJ가 생환 직후 기자들에게 전한 ‘피랍 닷새’에 대한 증언(동아일보 1973년 8월 14일자)이다.

‘(호텔) 복도로 나오자 ‘체육인’같이 생긴 청년 6, 7명이 몰려들었다. 나와 김 의원이 “왜 그러느냐”고 고함치자 내 입을 틀어막고 양 총재 옆방으로 밀어 넣었다. 이 방은 미리 빌려놓았던 것 같다. 내가 반항하니까 무릎 뼈를 치고 턱을 치면서 마취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빨간불이 홱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에 실렸다. 5, 6시간 달렸다. 어떤 큰 차고 같은 건물에 섰다. 화물을 부칠 때 쓰는 넓은 테이프로 코만 남기고 모두 감쌌다. …또다시 자동차에 태워졌다. 바닷가에 이르렀다. “바다에 던져지는구나” 생각했다. (그들은)모터보트로 옮겨 보자기를 씌운 후 1시간쯤 가더니 큰 배에 옮겨 실었다. 배는 속력을 내어 한없이 달렸다. …얼마를 가더니 처음의 결박을 풀고 다시 온몸을 단단히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잠시 풀린 두 손으로 십자가를 그었더니 그들은 나를 때렸다. …두 팔을 앞으로 묶고 50kg 정도의 물체를 달고 발에도 같은 무게의 물체를 매달아 상하좌우 옴짝달싹못하게 했다. 입에 재갈을 물려 눕혔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그렇게 하면 빠진다” “솜이불을 덮어야 안 떠오르지” “후까(일본어로 ‘상어’라는 뜻)…”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한국어를 아주 잘한 것으로 미루어 재일교포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예수에게 기도했다. 살려달라고 했다. 이때 갑자기 발동소리 비행기 엔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미친 듯이 배가 요동쳤다. (눈을 가린) 붕대 위로 얼핏 보니 빨간 불빛이 번쩍였다. 배는 또 10여 시간 달렸다. …11일 오전 한국 연안에 이르러 모터보트에 옮겨 상륙했다.’

그는 육지에서 내려 자동차를 두 번 갈아탄 뒤 누군가의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이 주는 알약 2개(수면제)를 먹고 깨어보니 2층 양옥이었다고 한다. 입을 틀어 막히고 손발이 묶이고 눈도 가려진 채 12일 아침을 맞았다. 13일 저녁 8시가 되자 ‘그들’이 “상부에서 석방하라고 해서 풀어준다”며 승용차에 태웠다.

‘두 시간 동안 달리면서 그들과 간혹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국동맹행동대’라고 했다. 무엇 하는 단체냐 물었더니 한참 있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반공하는 단체’라고 했다. …이윽고 차가 멎었다. 동교동 동사무소 근처에 내려놓으며 “3분 동안 돌아서서 용변을 보는 체하다 안대를 풀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약속대로 서 있는 자리에서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한참 지나자 사물이 보였다. 주유소 간판이 낯익었다.’(‘김대중 자서전’)

1972년 10월 11일에 집을 떠났으니 10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멀리 더위를 식히려 길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걸어 나온 길처럼 눈에 익었다. (마치) 저녁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문 앞에 서서 문패를 올려다봤다.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집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김대중 자서전’)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동아일보 8월 14일자가 전하는 생환 직후 DJ의 모습은 이랬다.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위가 터져 피가 맺혔고 오른쪽 발목에 두 줄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연한 하늘색 샤쓰에 줄무늬가 있는 고동색 바지를 입고 집에 돌아온 김씨는 실종된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했다…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도대체 그를 납치한 괴한들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갑자기 풀려난 것일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대중#납치#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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