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DJ 납치 사건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민주당 권노갑 상임고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고문은 당시 소식을 납치 다음 날인 1973년 8월 9일 라디오 뉴스로 들었다고 한다.
“사모님(이희호 여사)과 일본대사관으로 뛰어갔다. 대사관 직원들은 자기들도 수소문하고 있다, 곧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날부터 동교동과 대사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아사히 요미우리 도쿄신문과 교도통신까지 샅샅이 훑었다. 이승만 정부 때 사형당한 조봉암 생각도 났다. 며칠 지나자 일본대사관에서 ‘잘될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절망 속에서 한줄기 희망이 뒤섞이는 착잡한 시간이었다.”
일본 경찰 조사 결과 DJ가 일시 감금됐던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 방 욕조 지문 중 하나가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 것으로 나온다. ‘이로써 한국 정부기관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한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바로 서울지국이 폐쇄됐고 지국장을 포함해 특파원 세 명이 본국으로 추방됐다.
1973년 9월 5일 일본 수사본부는 김 서기관의 출두를 요구하지만 한국대사관은 면책특권을 내세워 거부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일본 국내에서 공권력을 행사했다고 판단된다’며 항의의 뜻으로 가을로 예정되어 있던 한일 각료회의를 무기한 연기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한일 외교 갈등이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납치 사건 직후인 1973년 8월 29일 북한의 남북대화 중단선언 관련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대중 씨를 중앙정보부가 납치했다는 유언비어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시간이 흐르면 알 것이다. …우리 중앙정보부가 현재의 국제정세 등 여러 가지를 봐서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할 기관은 아니며 그 정도 양식은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는 말로 강하게 부인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1987년 동아일보 이종각 기자와의 인터뷰(신동아 10월호)에서 사건 정황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직접 주도했다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당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심증을 갖게 한 ‘인터뷰 특종’이었다. 장문의 기사 중 관련 부분만 압축해 정리한다. 이 전 부장의 말이다.
“1972년 5월 24일 김일성이를 만났는데 ‘남쪽에는 통일 방식을 달리하는 민주 인사들도 많데요’ 합디다. 내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남한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의견이 이러쿵저러쿵 나오는 것은 우리 약점이구나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방방곡곡 연설도 하고, 그중 어떤 사람들은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 솔직히 그때 남북대화에 미쳐 있었어요. …이북 놈들하고 대화할 때마다 ‘통일에 대한 딴 의견이 남쪽에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밥 먹듯이 하는데 이러다가는 남북대화는 어렵다, 또 해외에서 무슨 조직이든 만들어서 반한(反韓), 반정부 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망명정부가 이루어졌을 때는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느냐…결국은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람(김대중)을 본국으로 데려와야겠다’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납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이 전 부장은 “당시 김대중 씨가 공화국 연방제를 주장한 것도 납치 사건의 한 요인이 됐느냐”는 이종각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하필이면 이름을 왜 공화국 연방제를 내걸어요. 나는 진짜 기절할 정도로 쇼크를 받았어요. 남북대화는 다 틀렸구나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지금도 그 (연방제라는) 말을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항상 국가안보라는 것은 최악의 경우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998년, DJ가 대통령이 된 지 4개월 뒤인 6월, 동아일보는 DJ 납치 두 달 뒤인 1973년 10월 10일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한다(6월 10일자). 270쪽 분량의 이 비밀 전문에 따르면 하비브 대사는 “납치 사건이 명확히 이 전 부장 지시 아래 이뤄졌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시적(explicit) 또는 묵시적(implicit)으로 계획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정부는 계속 정부나 어떤 기관도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는 한국 정부가 이번 사건을 제대로 조사했다는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한편 이 문서에는 DJ의 극적 생환이 미국의 개입 때문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비브 대사는 김 씨가 납치되자마자 청와대 중앙정보부 총리실과 접촉, 소재 파악에 나서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했으며 한국 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단서를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김 대통령은 일본에서 납치돼 선박 용금호에 강제로 태워진 뒤 공해상에서 수장될 위기에 처했으나 CIA가 개입해 비행기가 출현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고 증언했다.’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는 대대적 조사에 착수한다. 국정원 보존자료 1만2833쪽과 김대중도서관 등 타 기관 보관자료 2651쪽, 납치 사건에 관여한 전직 중정 요원 11명과 용금호 선원 4명을 포함해 모두 18명에 대한 면담조사를 한 결과 “이 부장이 중앙정보부 공작부서에 납치공작을 추진토록 지시했다는 것은 확인됐지만 박 대통령이 사전에 지시를 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납치 계획을 담은 사건의 핵심자료인 ‘KT공작계획서’가 남아 있지 않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고 최종 발표했다.
그러면서 과거사위는 이 전 부장과 동향 출신으로 DJ와 가까운 최영근 전 의원의 증언도 공개했다. 최 전 의원은 “이후락 부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납치)하게 됐다’는 의미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권노갑 고문은 “이 부장이 2009년 작고 전 경기도 여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길래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으나 이뤄지지 못했다”고 했다.
‘DJ 납치 사건’은 결과적으로 DJ를 민주화 영웅으로 전면에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처럼 ‘한국의 민주투사’로 상징되는 국제적 인물로 만든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는 박 대통령의 가장 강한 ‘정치적 라이벌’로 자리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다시 권 고문의 말이다. “71년 대선에서 아깝게 패한 이후 유신이 선포되면서 앞으로는 대선도 없을 것이며 더이상 박정희를 무너뜨릴 수도 없으리라는 절망이 팽배해 있을 때 목숨 걸고 절대 권력자에게 맞서 싸운 민주 지도자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DJ를 국제적인 거물 정치인으로 키운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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