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DJ 납치사건’ 핑계로 남북대화 중단 선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4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3>첫 반(反)유신 시위

1973년 10월 2일 첫 반유신 시위로 기록된 ‘10·2시위’ 중 서울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로 붙잡혀 연행되고 있는 문리대생들. 동아일보DB
1973년 10월 2일 첫 반유신 시위로 기록된 ‘10·2시위’ 중 서울대 교내로 들어온 경찰들에게 마구잡이로 붙잡혀 연행되고 있는 문리대생들. 동아일보DB
‘DJ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권을 돌이킬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국민들에게 행여나 하는 기대를 주었던 남북대화도 평양 측의 일방적인 성명으로 중단되고 국내에서는 치열한 유신공방이 그 열기를 더해간다.

1973년 8월 28일 오후 6시 평양방송은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김영주 공동위원장 명의로 된 성명을 발표하면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를 주도했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애국적 민주인사를 체포·탄압하고 있으므로 남북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전격 선언했다.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들떴던 남북관계는 이내 차갑게 얼어붙었다.

DJ 납치사건은 대학가 반유신독재 시위에도 불을 댕겼다.

71년 말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얼어붙은 학생운동권은 72년 10월 유신까지 선포되자 숨을 죽이고 있었다. 1973년 전반기까지만 해도 음성적인 지하 유인물을 뿌리는 정도였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었다. 그중에서는 73년 4월 22일 새벽 5시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정도가 특기할 만했다.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통해 빈민선교를 하던 서울제일교회 전도사 권호경은 많은 기독교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기회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서울제일교회 당회장 박형규 목사의 동의 아래 ‘회개하라 위정자여’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회개하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의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와 전단을 제작한 뒤 부활절 새벽 예배에 참석하고 귀가하는 교인들 일부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그로부터 70여 일이 지난 7월 6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박 목사, 권호경 전도사 등 네 명이 군중을 선동해 방송국과 관공서를 점령하여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며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구속자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 정치재판의 현장’(1997년·일요신문사)이란 책에서 “찬송가와 성경을 들고 모이는 부녀자 중심의 신자들이 폭력으로 방송국과 정부 청사를 점령하고 정부 전복을 하려 했다니, ‘각본’치고는 수준 이하였다”고 했다.

어떻든 이 사건은 비상계엄과 10월 유신 이후 숨죽이고 있던 운동권 내부에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해 불거진 최초의 행동이었다. 여기에 현직 목사 등 다수의 성직자와 기독 학생들이 구속되자 교단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런 상황에서 8월 8일 DJ 납치 소식이 알려지자 반정부 반독재 시위가 전국 각 대학으로 번졌다. 시위, 농성, 단식, 동맹휴업, 연좌, 시험거부 등이 잇따랐다. 마침내 1973년 10월 2일 학생운동권 내 반유신독재의 첫 봉화라 할 수 있는 ‘10·2시위’가 서울대 문리대에서 있게 된다.

10월 2일 오전 11시 문리대 각 강의실 복도에서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나자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학생회 간부들이 학생들을 긴급하게 소집하기 위해 외친 소리였다. 학생회는 이들을 교내에 있는 4·19 기념탑 앞으로 인도하여 준비된 비상총회를 열었다. 선언문이 낭독됐다.

“오늘 우리는 너무도 비통하고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사회에 만연된 무기력과 좌절감, 불의의 권력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모든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를 딛고…진리를 기어코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

학생들은 삽시간에 600∼700명으로 불어나 스크럼을 짜고 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내를 돌았다. 보통 이과계 학생들은 시위가 터지면 구경만 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이날만큼은 달랐다. 여학생들까지 물동이를 들고 시위에 가담하거나 거들었다.

낮 12시 30분경 교문 밖에서 대치하고 있던 경찰이 교내로 진입해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잠깐 사이에 180명의 학생이 경찰서로 연행됐다. 이 중 20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9명이 불구속 처분됐다. 그러나 경찰과 당국은 시위 주동 인물들이 대부분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의 친척 동료, 이들이 소속된 교회 교인들까지 마구잡이로 조사했다. 결국 주동 인물들은 10월 중순 모두 붙잡힌다.

유신체제 출범 이후 1년도 채 못 된 시점에서 일어난 10·2시위는 문리대에만 머물지 않고 10월 4일 법대, 5일 상대로 번져갔다. 10월 9일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전국 대학 총·학장들에게 학생지도를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서울대는 23명을 제적하고 18명은 자퇴, 56명에 대해서는 무기정학 처분을 내리는 등 대규모 징계를 단행하지만 시위 학생들 중 구류를 마친 학생들이 풀려난 10월 하순부터 전국 각 대학에서 학생들의 석방과 처벌 백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불길처럼 번져간다. 학생들이 선택한 저항은 ‘동맹휴학’이었다.

민주당 유인태 의원의 회고(‘실록 민청학련’)다.

“주로 학과 단위로 모여 토론을 하고 투표로 동맹휴학을 결의하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소수 학생의 선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동맹휴학은 시위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었으나 서울대 문리대 등 여러 대학에서 거의 100%에 달하는 성공률을 보였다. 1947년 국대안 반대(1946년 미 군정청의 국립대학안 반대에 들고 일어난 동맹휴학 사건) 이후 처음 보는 규모였다. 이화여대나 연세대 등 기독교 계통 대학에서는 채플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10·2시위’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반유신 학생운동에 전기(轉機)를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유신 출범 이후 패배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던 학생운동권과 지식인들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소중한 지식인 한 사람이 희생되는 일로 이어진다. ‘10·2시위’ 학생들에 대한 처리방안을 두고 열린 긴급 교수회의에서 학생들을 두둔했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10월 20일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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