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1월 28일 이화여대생 4500여 명이 대강당에서 예배를 마친 후 시위에 돌입했다.
김옥길 총장도 11월 30일 정부에 건의서를 보내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건의서에서 ‘이화여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선언문이나 결의문에서 표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가 지적한 것들은 △정보수사기관의 지나친 간섭과 횡포, 거기에 따르는 불신풍조의 증대, 부정부패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의 지나친 위축 △김대중 씨 납치사건에 대한 의심 등에서 오는 불신과 반발 △일본 자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 관한 염려 △일본인 관광객에게 유린당하는 여권(女權)에 대한 울분 △빈부의 격심한 차이에 대한 의분(義憤) △구속·구류된 학우들에 대한 우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밑바닥에서부터 전한 용기에 찬 내용이었다. 김 총장은 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용단을 촉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계의 큰별이었던 고 김옥길 총장(1990년 작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세기 씨는 김옥길 평전 ‘자유와 날개’(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앞서 언급한 1973년 11월 28일 이화여대 시위에서 김 총장이 보여준 제자에 대한 사랑과 담대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강당 채플이 끝나자 4500여 학생들이 ‘유신 결사반대’ ‘구속 학우 석방’을 외치며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초겨울임에도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다.…김 총장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 서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전해 10월 대규모 시위에서도 그는 정문을 뚫고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나가려거든 먼저 나를 밟고 나가라”고 소리쳤었다. 이화사(史)에 ‘남기고 싶은 말’로 기록된 이 한마디는 학교 밖으로 맹진하려던 행렬의 속도를 일시에 중단시켰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민주화를 쟁취하는 일은 민족 감정의 분출이었고 이를 이룩하려는 학생들의 각오는 목숨을 건 사투였다. 시위 행렬은 순식간에 이화교를 벗어나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내달렸다. 학생들이 기승을 부릴수록 경찰은 난폭하게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대었다.…총장은 경찰의 진압을 온몸으로 막으면서 벌써 다섯 시간째 학생들의 아우성과 격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대강당으로 가서 철야기도를 하자”고 학생들을 달랬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지칠 대로 지친 긴 대열을 이끌고 학교로 돌아왔다. ‘철야기도’를 내세운 총장의 순발력은 벼랑 끝에 서 있던 학생들에게 돌파구를 찾아준 것이었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이화여대 학생들과 교수 200여 명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철야로 진행된 이날 기도회에서 김 총장은 내내 침묵으로 학생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되자 단상에 올랐다. 학생들의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지도자이자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날 학생들의 희생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김 총장이 데모 행렬의 선두에서 학생들의 진출을 저지했기 때문이고 학생들도 저지선을 뚫지 않고 총장의 지시를 따라 준 결과였다.…아침에 경찰이 주동 학생을 연행하러 왔을 때도 그는 학생회장 등을 총장 공관에 피신시키고 직접 서대문경찰서로 가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 학생들을 구속되지 않게 막았다.’(‘자유와 날개’)
김 총장의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용기에 대해 당시 언론들도 ‘극도로 위급한 최악의 사태에서 한 사람의 희생자 없이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교 안으로 시위를 유도한 김 총장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통해 칭송할 정도였다.
김 총장이 마냥 학생들 편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젊은이들을 향해 ‘기다림’을 주문했던 큰어른이었다. 당시 그의 어록 중 한 대목이다.
“오래 가꾼 나무에서 아름다운 꽃을 기대할 수 있듯이 기다림은 꿈이 있는 사람들만의 자랑스러운 특권이다. 눈앞의 손가락만 보고 멀리 떠있는 달을 보지 못하는 자에겐 꿈이 있을 수 없다. 국가는 한 독재자의 사유물일 수 없다. 국가가 비록 일시적으로 압제자의 폭압에 놓인다 해도 끝내는 정의로운 국민의 열망을 받아들일 것으로 확신한다. 승부 없는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런 시기’는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김 총장은 재임기간 내내 학생시위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만 했지만 학생들을 거리로 진출시키지 않고 교내 비폭력 시위를 끈질기게 유도하면서 ‘때’를 기다릴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또 아우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에는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투옥된 민주 인사 가족들을 돌봤다. 김지하 시인 가족과도 이때 알게 됐다. 김 시인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 이야기다.
“김 총장님은 김동길 교수가 민청학련 사건에 엮이면서 민청학련 사건 가족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우리 식구들도 많이 챙겨주셨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났을 때에는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김 시인 변호도 해주셨고. 원보(김 시인의 맏아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원보가 막 태어났을 때에는 옷을 한보따리 사오시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김 시인 옥바라지를 하면서 폐렴에 걸렸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감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기침을 해대니까 총장님이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며 병원에 가자 하셔서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진찰 결과 폐렴이었다. 9일인가 입원을 했는데 입원기간 내내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다. 나한테만 그렇게 해주신 게 아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 가족들 중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도 사주시면서 소리 없이 도와주셨다.”
전국 각 대학의 유신반대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하던 1973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돌연 유화조치를 내놓는다. 10월 2일부터 일부 학원에서 있었던 학원사태와 관련해 구속 학생 전원을 즉시 석방하고 학칙에 의해 처벌된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 처벌을 백지화하는 조치였다.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 때도 그랬지만 박 대통령은 잡아들일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잡아들이더라도 이내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박 대통령은 또 12월 개각을 하면서 DJ 납치, 최종길 교수 고문 치사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신직수 법무장관을 임명하면서 국면 전환 인사를 한다. 수장이 바뀌긴 했지만 중앙정보부의 권력 전횡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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