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축구가 대중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축구광들이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축구 이야기만 해대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피해 프랑스 파리에 집을 얻어 살기도 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라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게 브라질 사람들이다. 그런데 브라질에서 요즘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16일 브라질 월드컵의 리허설격인 컨페더레이션스컵 개막식에 참석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에게 관중은 야유를 보냈다. 거리에서는 “엿 먹어라, FIFA(국제축구연맹)!” 같은 구호가 터져 나왔다.
브라질은 지난 2년간 월드컵 개최 경비에 140억 달러(약 16조2000억 원)를 쏟아 부었다. 그런데 6월 초 상파울루 시당국이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 요금을 3헤알(1563원)에서 3.2헤알(1667원)로 인상하자 갑자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교통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트위터 메시지가 불과 보름 만에 브라질 전국을 뒤흔들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어떻게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브라질인들이 축구에 대한 국가 재정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공공의료와 대중교통 서비스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일까. 브라질 사태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로스 인디그나도스(Los Indignados·분노한 사람들)’의 연장이다.
2010년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외교관이었던 스테판 에셀이 출간한 책 ‘분노하라(Indignez-Vous)!’의 메시지는 지구촌을 휩쓸었다. 스페인 젊은이들이 시작한 ‘로스 인디그나도스’ 시위는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독재정권을 몰아내는 ‘아랍의 봄’으로 번졌고, 그리스 사태를 넘어 미국 뉴욕 월가 점령시위로 이어졌다.
나라마다 종교, 민주화, 실업, 금융위기 등 시위의 이유는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작은 사건이 커다란 불길로 번진다는 점이다. 5명이 사망하고 5000여 명이 다친 터키 시위도 탁심 광장 한 구석의 녹지대 공원에서 나무를 베어내는 일에서 시작됐다. 작은 사회적 균열이 수십 년간 누적돼 온 불만을 깨닫게 하고, 참고만 살아온 사람들에게 분노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시위를 체험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 미국과 같은 선진국 도심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지난 10년간 신흥경제국으로 떠오른 브라질 터키에서도 최루탄과 폭력이 난무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로스 인디그나도스는 언젠가 중국을 거쳐,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잘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정당한 분노가 사회를 성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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