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검 공안부는 1974년 2월 25일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문인 간첩단’을 적발했다며 이호철 정을병 김우종 임헌영 장병희 5명을 반공법 위반 및 간첩 혐의로 구속하고 언론인 천관우 등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재일 공작지도원에게 포섭되어 문단 언론계 학계의 동태를 보고하고 반정부 활동을 선동하는 작품 활동과 북한 지령을 실천하기 위해 문인 개헌서명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형사지법은 10월 31일 선고 공판에서 정을병에게는 무죄를,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병희에게는 징역 1년∼1년 6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해 모두 풀어줬다.
소설가 정을병은 1974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단편 ‘육조지’를 발표하는데 옥중생활에서 들은 수감자들의 체험담을 엮은 것이었다. 내용이 재미있다.
‘집구석은 팔아 조지고(재판 비용과 생계비를 마련하느라 세간을 팔고), 죄수(수형자)는 먹어 조지고(교도소에서 사식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먹고), 간수(교도관)는 세어 조지고(틈만 나면 수형자 숫자를 헤아려 괴롭히고), 형사는 패 조지고(자백을 받기 위해 구타하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구치소에서 소환해 신문하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재판 기일을 미뤄 괴롭힌다)’는 현실 풍자였다.
긴급조치 1호와 2호라는 극약처방으로도 민주화 열기를 꺾을 수 없었으니 박정희 대통령은 1, 2호 발표 석 달 뒤인 4월 3일 밤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4호는 순전히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일망타진하는 조치였다. 특정 사건 하나만을 겨냥해 만든 법률이라는 점에서도 초유의 법령이었거니와 내용도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구성원과 연락하거나,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대학생이 출석 수업 시험을 거부하거나 집회 시위에서 성토 농성한 자,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5년 이상 유기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사형’ 포고령이 내린 것이다. 4호를 위반한 대학생은 퇴학 정학은 물론이고 학생이 소속된 학교는 문교부 장관이 폐교 처분까지 할 수 있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4월 25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와 조총련계 및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 세력”이라고 했다.
민청학련 수사 대상자 수는 엄청났다.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45명이 훈계 방면, 25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됐다.
그렇다면 민청학련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변론을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한인섭 교수와의 대담집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4월 3일 날 일제히 데모를 하려던 계획이 들통이 나서 긴급조치가 내려진 사건이다. 하지만 (발표 내용을 보면) 데모를 주도했던 수괴 지도부가 있고 반국가 단체이니 군법회의에서 관할하고 처단한다는 것이어서 국민들이 느끼기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법정형도 어마어마한 중형이었다. …이철, 유인태는 완전히 간첩이고 민청학련은 공산 혁명을 하기 위한 반국가 단체였다. 사건 관련자들은 1급 수배범으로 신문에 났고, 현상수배가 붙었다.’
홍 변호사는 “관련자들이 하도 많다 보니 공소장에 ‘공소 외’ 누구누구 이름만 나온 게 100명도 넘는다”며 “주요 피고인만 32인, 공소장은 549쪽, 판결문만 423쪽이다. 이때 등장하는 사람들을 인명색인을 만들면 197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실제로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민청학련’ 사건은 홍 변호사 말대로 1974년 봄에 4·19처럼 전국에서 ‘데모 한판 크게 하자’는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 민청학련’(학민사)에 실린 민주통합당 유인태 의원의 회고다.
“유신에 맞서 새로운 차원의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여론은 73년 11월 말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재학생들은 물론 그전에 3선 개헌 반대운동(69년) 등을 하다 제명 제적되었다가 재입학한 선배 그룹과 군에서 제대한 복학생 그룹들도 73년 10·2시위에 고무되어 자신들도 뭔가 기여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미 졸업한 선배들과도 긴밀히 연락하면서 도움을 구했다.”
다음은 재야에서 유신헌법 개헌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김지하의 말이다.
“어느 날 꼭두새벽에 정릉 처가로 웬 대학생 한 사람이 찾아왔다. 이철 아우였다. 사연과 내력, 연고 등을 다 물어 확인한 뒤에 간단히 안팎과 주객관적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철 아우는 유인태 아우와도 접촉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나는 이미 조영래 아우에게서 이철 아우에 대해서는 다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됐다가 1975년 2월 17일 석방된 이철 전 의원은 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을 하다 제적되어 군에 징집되었다가 복교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있었던 반유신독재의 첫 시위였던 ‘10·2시위’가 민청학련의 태동이었다고 말한다.(‘실록 민청학련’)
“평소 학생운동에 미온적이었던 의대 공대를 비롯해 여학생들까지 나선 10·2투쟁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불길을 잘 만들어 전 국민적 항쟁으로 만들면 제2의 4·19혁명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듬해(74년) 신학기가 되면서 이런 의견들이 이심전심으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가 주도했다거나 일방적으로 리드했다’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서울대가 주도를 하긴 했지만 재야 선배그룹들은 물론 종교계까지 망라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청학련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운동권은 당시 운동권을 총망라 했다. 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으로 강제 징집된 후 복학한 그룹(서중석 유인태 안양로 정윤광 이철 등)에서부터 학생운동권을 포함해 1970년 중반부터 교회운동에 투신한 기독학생회 그룹(서경석 나병식 황인성 등), 종교계 지학순 주교 및 원주팀(김지하, 박재일)과 졸업생 그룹(유근일, 김지하, 이현배, 장기표, 조영래 등) 정계(윤보선 전 대통령 등), 재야 원로(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문학계, 학계(김동길, 김찬국, 백낙청 등)까지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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