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악역으로 흥행 유지하는 北의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3일 03시 00분


이정은 정치부 기자
이정은 정치부 기자
웅장한 대리석 기둥과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드높은 천장. 로비의 통유리 바깥으로 펼쳐지는 새파란 바다의 전경.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이 묵고 있는 브루나이 엠파이어호텔은 올해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10대 호텔’ 중 하나로 선정된 7성급 호텔이다. 이 아름답고 우아한 리조트 호텔은 1일 오후 큰 소동에 휩싸였다.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양자회담을 하고 나온 북한 박의춘 외무상을 따라 취재진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여성 경호원들까지 포함해 10여 명의 경호인력이 어깨동무로 스크럼을 짜고 박 외무상의 주변을 에워싸면서 취재진과 마찰을 빚었다. 취재전쟁과 경호전쟁이 맞붙은 형국이었다.

전날 브루나이 국제공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40여 명의 국내외 취재진과 경호원이 뒤엉킨 상황에서 한 일본 기자가 넘어지면서 팔에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급거 귀국해야 했다. 이런 소란과 소동은 박 외무상이 나타나는 주요 국제회의장마다 반복돼 왔다. 웃음 띤 얼굴로 나타나는 박 외무상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 외무상에 대한 취재진의 지대한 관심은 핵개발을 추진하며 국제사회의 악동을 자처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향배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북한 대표의 흥행은 ‘또 어떤 사고(事故)를 치지 않을까’ 하는 악명을 앞세워 유지되는 셈이다. 박 외무상은 질문 공세를 퍼붓는 취재진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회의장에서 입을 열면 “미국이 적대정책을 먼저 철회해야 한다”거나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등 변함없는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81세 고령의 박 외무상이 국제무대에서 무슨 대단한 교섭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은 회의 참석 자체가 교섭활동”이라며 “ARF 주최국이 행사의 흥행 요소인 북한이 ‘다음 해에 참석 안 한다’는 식으로 버티면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고가의 숙박비 등 비용도 주최국 정부가 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외무상의 침묵과 그에 대비되는 요란스러운 취재경쟁과 경호 소동을 몇 차례 지켜보면서 ‘북한 외교의 이런 행보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상 국가의 비정상 외교를 향해 몰려드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검찰에 출두하는 범죄용의자를 향한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기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이정은 정치부 기자 lightee@donga.com
#이정은#북한#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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