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대리석 기둥과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드높은 천장. 로비의 통유리 바깥으로 펼쳐지는 새파란 바다의 전경.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이 묵고 있는 브루나이 엠파이어호텔은 올해 아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10대 호텔’ 중 하나로 선정된 7성급 호텔이다. 이 아름답고 우아한 리조트 호텔은 1일 오후 큰 소동에 휩싸였다.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양자회담을 하고 나온 북한 박의춘 외무상을 따라 취재진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여성 경호원들까지 포함해 10여 명의 경호인력이 어깨동무로 스크럼을 짜고 박 외무상의 주변을 에워싸면서 취재진과 마찰을 빚었다. 취재전쟁과 경호전쟁이 맞붙은 형국이었다.
전날 브루나이 국제공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40여 명의 국내외 취재진과 경호원이 뒤엉킨 상황에서 한 일본 기자가 넘어지면서 팔에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급거 귀국해야 했다. 이런 소란과 소동은 박 외무상이 나타나는 주요 국제회의장마다 반복돼 왔다. 웃음 띤 얼굴로 나타나는 박 외무상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 외무상에 대한 취재진의 지대한 관심은 핵개발을 추진하며 국제사회의 악동을 자처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향배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북한 대표의 흥행은 ‘또 어떤 사고(事故)를 치지 않을까’ 하는 악명을 앞세워 유지되는 셈이다. 박 외무상은 질문 공세를 퍼붓는 취재진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회의장에서 입을 열면 “미국이 적대정책을 먼저 철회해야 한다”거나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등 변함없는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81세 고령의 박 외무상이 국제무대에서 무슨 대단한 교섭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은 회의 참석 자체가 교섭활동”이라며 “ARF 주최국이 행사의 흥행 요소인 북한이 ‘다음 해에 참석 안 한다’는 식으로 버티면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주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고가의 숙박비 등 비용도 주최국 정부가 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외무상의 침묵과 그에 대비되는 요란스러운 취재경쟁과 경호 소동을 몇 차례 지켜보면서 ‘북한 외교의 이런 행보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상 국가의 비정상 외교를 향해 몰려드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검찰에 출두하는 범죄용의자를 향한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면 기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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