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심규선]“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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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28일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마라톤. 스타디움 트랙에서 따라잡혀 2위와 6초 차로 아슬아슬하게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국 방송과의 인터뷰. “메달 색깔은 동(銅)인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울었다. “아쉽다”는 말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런 말을 하다니…. 선수의 이름은 일본의 아리모리 유코(당시 29세).

▷그는 4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일본 여자마라톤의 희망. 그러나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허탈증후군’에 빠졌다. 혹사한 양 발바닥에 염증이 생겨 수술까지 받았다. 자포자기의 생활. 그러다 병원에서 노인들이 인공관절을 박고 다시 걷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뉘우쳤다. “연습하면 다시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나는 행복한 것 아닌가.” 옆 병실에는 자기와 똑같은 수술을 받은 유명 마라토너가 있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황은 말했다. “나는 금메달을 땄다. 당신은 은메달 아닌가. 한 번 더 도전해보라.” 그의 말이 가슴을 때렸다.

▷3년간의 허송세월을 청산했다. 그리고 맹훈련. 일본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처음으로 2회 연속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인터뷰 당시 울음은 아쉬움이 아니라 자찬(自讚)의 세리머니였던 것이다. 겸양이 최고의 미덕인 일본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해 말 그는 TV 여론조사에서 ‘1년 동안 가장 열심히 산 사람’으로 선정됐고, 그의 발언은 ‘일본 신조어·유행어 대상’을 받았다. 일본 국민이 그의 삶과 말에 보낸 공감의 박수였다.

▷17년이 흘러 요즘 골프 역사를 갈아 치우고 있는 박인비(25)가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고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 시대의 젊음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당당함도 일품이다. 칭찬도 ‘간접발광’에서 ‘자체발광’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고…. 박인비가 내달 영국 브리티시오픈에서 또 한 번 스스로를 칭찬해주길 기대한다. 욕심도 당당해지는 시대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아리모리 유코#박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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