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영국’을 만들었다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천일의 앤’의 주인공 앤 불린에게서 태어나 반란죄 누명을 쓰고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으며, 즉위 후에는 온갖 도발과 위기, 전쟁을 겪어야 했다. 사냥을 좋아했고 때로는 남자들과 경쟁하며 호탕하게 욕지거리를 뱉어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성으로 인정받는 즐거움 또한 잊지 않았다. 수천 벌의 옷과 몇 톤에 이르는 장신구를 모아 하루 몇 시간씩 공을 들여 자신을 치장했고 살이 찔까 두려워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남자들로부터 ‘궁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칭송을 들어가며 관심을 독차지하기를 즐겼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엘리자베스 1세와 닮아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동시에 화려한 성공을 꿈꾼다. 경쟁에 익숙해 뒤지는 것을 싫어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위험과 도전을 추구하는 반면 여성은 안정을 바라는 경향이 강했다. 학자들은 호르몬에서 차이의 원인을 찾아냈다. 테스토스테론과 바소프레신이 남성을 도전으로 끌고 가는 데 비해 여성은 옥시토신이나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아 안정을 우선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 역할 분담의 산물이기도 하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데 10개월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며 그 이후에도 아이가 서서 걷고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돌봐줘야만 한다. 여성은 자신과 아이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단백질과 철분(고기)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줄 수 있는 강한 남자, 능력이 탁월한 남자를 선택해야 했다. 남성 역시 강인한 힘과 서열상 우위를 과시함으로써 여성의 선택을 얻어내야 자신의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세상이 열렸다. 경쟁 친화적으로 키워진 현대 여성은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며 성공을 이룩했으나 그 대가로 안정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남들 앞에선 자신감이 넘치지만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 쓰느라 자유롭지 못하며 혼자 있을 때에는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한다. 테스토스테론이 만들어낸 경쟁심과 상반된 에스트로겐의 안정감이 공존하다 보니 모순적 삶이 힘들게 느껴진다.
이제 여성에겐, 일의 성공만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행복과 안정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그래서 여성은 끊임없이 ‘내가 생각하던 나’의 모습인지 수시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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