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발트3국보다 못한 정부 경쟁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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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대통령 비리 고발… 탄핵으로 물러나게 한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 국정원장
제때, 제 할 일, 제대로 하는 공평과 소신이 사회적 신뢰 키워
정권 따라 춤추는 우리 관료집단… 스스로 개혁하든가, 개혁당하든가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2004년 봄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 지구상에 또 있었다. 발트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의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하루 뒤인 2003년 2월 26일 취임한 그는 “서민들 편에서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겠다”던 포퓰리스트였다. 그해 10월 국가정보원은 “대통령의 대선 자금을 댄 러시아 무기상이 러시아 범죄조직과 연관돼 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지 12년밖에 안된 인구 350만 명의 신생 국가에 러시아는 우리가 북핵에 느끼는 것 못지않은 안보 위협이었다.

물론 팍사스는 기득권 세력의 음모라며 지지세력 결집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거래’가 담긴 통화가 공개되자 여론은 돌아섰고, 국회는 엄중한 절차를 거쳐 2004년 4월 대통령을 탄핵 해임했다.

1일부터 6개월간 유럽연합(EU) 의장국을 맡은 이 나라의 과거사를 들여다보게 된 건 지난주 콘퍼런스 때문이었다. EU 회원국과 한국 미국 일본 등 41개국 기업가에 대한 국민의식이 발표됐는데, 반(反)기업 정서 부문에서 우리나라는 폴란드만 빼면 1등이었다.

‘동유럽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로 주제발표를 한 질비나스 실레나스 리투아니아 자유시장연구소장이 유일한 한국 사람인 나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기업을 악마로 가르친 게 소련이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발트3국의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사회민주주의로 스스로 개혁해 법과 제도 정비에 힘썼다. 부와 일자리를 만드는 건 결국 기업 아닌가.”

연구 결과 역시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처럼 경제 잘 돌아가고, 정부 경쟁력 높고, 부패 적은 나라일수록 반기업 정서도 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독립한 지 22년밖에 안 되는 리투아니아 정부가 우리 정부보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2년 국가경쟁력지수는 우리가 앞서지만(144개국 중 한국 19위, 리투아니아 45위) 정부만 놓고 보면 우리가 뒤졌다(한국 62위, 리투아니아 60위). 국정원장만 비교해도 그렇다.

대통령이라도 국가 안보를 위해(危害)할 순 없다. 현직 대통령을 고발한 당시 리투아니아의 국정원장은 직(職)은 물론 목숨도 걸었을 터다. 나라야 어찌되든 대통령 옆에서 열심히 딸랑대던 우리나라의 전직 국정원장들, 사실상의 정치 개입으로 나라를 뒤흔든 현 국정원장과는 격(格)이 다른 셈이다.

리투아니아가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을 탄핵으로 쫓아냈을 때 세계 여론은 “민주주의가 공고해졌다”고 평했다. 지금 이 나라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모범생으로 꼽힌다. 발트3국 중에서도 법과 제도에서 가장 앞선 에스토니아(30위)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구조개혁에 성공해 성장세를 회복했다.

스스로 동유럽보다 북유럽 문화에 가깝다고 보고, 하루빨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부 의지와 국민의 공감대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기득권 수호에 매달려 민족감정을 자극해선, 또 다른 독재로 몰고 간 발칸 국가의 공산당 잔존 세력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박근혜정부는 WEF의 평가를 지난 정부의 성적이라며 넘길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정부 경쟁력은 나아진 것 같지가 않다.

지긋지긋한 부패를 뿌리 뽑겠다고 마련했던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 및 이해충돌 방지법)’은 과잉입법이라는 관(官)의 반발에 포괄적 맹탕으로 주저앉을 듯하다. 겸직금지 등 국회법 개정에서도 현역 의원을 제외해 자신들만의 특권을 지켰다. 그러니 정책투명성 133위, 정치인에 대한 신뢰 117위, 정실인사 89위 같은 밑바닥 정부 성적이 실감나는 것이다.

재벌들의 반사회적 행위가 판을 쳐 반기업 정서에 불을 지른 데도 콩가루 정부 탓도 크다. 국세청은 2007년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차명재산을 알아내고도 세금만 받아낸 뒤 검찰에 고발도 안 했다. CJ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을 받던 대통령 측근은 수사선상에 올랐다가도 빠져나갔다.

그때는 무력했던 검찰이 이제 와 재벌 회장을 구속했다. 경제민주화 바람이니, 재벌 길들이기니 하는 평도 있지만 뒤늦은 사법 제자리 찾기라면 다행이다. 국민이 새 정부를 믿고 따를 건지 말 건지를 정하는 관건이 공평한 사법시스템이라고 했다. 정권에 맞춰 춤만 추는 검찰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사회통합이든, 정책에서든 사회적 신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부 3.0’이라는 효과가 불분명한 정부개혁보다 확실하게 국민의 신뢰를 키우는 방법을 알려준 연구결과도 있다. 정부기관이 제때 제 할 일을 공평하게 하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는 거다.

그걸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다. 정부를 줄임으로써 불합리와 규제, 부패까지 획기적으로 줄여버리는 길이다. 박근혜정부는 어떤 쪽을 택할 텐가.―브뤼셀에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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