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몇몇 지인 앞에 지도를 펼쳐놓고 ‘거창군’(경남)을 짚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단박에 찾지 못했다. 나도 거창에 간 건 딱 두 번. 2000년 백두대간 취재 때와 2년 전이 전부다. 이렇듯 여행전문기자에게마저 외면당한 거창. ‘대한민국 구석구석’이란 슬로건 아래 이어져온 정부의 국민 관광 활성화 노력에도 거창은 여직 미답 미지로 남은 여행지 중 하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거창이 별 볼 일 없는 여행지는 아니다. 거창만큼 ‘특별한’ 곳도 없다. 매년 여름 열리는 ‘거창국제연극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냐 할 이도 있을 것이다. 여기 말고도 많아서인데 밀양과 마산(이상 경남), 부산, 전남 여수 순천, 전북 전주 등등. 하지만 그것과 비슷하다면 굳이 ‘특별’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못했을 터이다. ‘수승대’(거창군 위천면) 계곡에서 캠핑하는 휴가객을 관객으로 모시는 야외무대에 세계 곳곳의 극단이 참가한다는 점에서다.
2년 전 7월 하순이었다. 친구 손에 이끌려 수승대 야외무대를 찾았다. 그날은 극단 목화가 ‘템페스트’를 무대에 올렸다. 야외공연장에서, 그것도 계곡 물가라니 별반 기대는 갖지 않았다. 무대는 조악하고 조명 등 여건도 좋을 리 없을 테니. 게다가 도착한 건 어둑어둑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곧장 극장으로 가는 바람에 주변의 계곡 풍광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극장 앞에 펼쳐진 광경이 나를 놀라게 했다. 초등생까지 가족관객이 줄지어 야외극장에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야외객석은 연신 부채질을 하며 막 오르기만 기다리는 가족관객으로 만석이었다. 나도 한때 연극을 담당했던 터라 연극판은 어지간히 아는데 이렇듯 객석이 가족으로 채워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놀라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공연에서도 이어졌다. 무대는 조명의 불빛에 이끌려 날아든 날벌레로 어수선했고 가면에 분장에 의상을 갖춘 배우들이 후텁지근한 무더위에 조명불빛 세례까지 받아 땀범벅일 터. 그럼에도 연기는 진지했고 열정은 객석까지 전해졌다. 연극은 세 가지로 이뤄진다. 희곡 배우 관객. 희곡이야 무대가 실내든 야외든 관계없다. 그러나 관객과 배우는 다르다. 야외에선 몰입도와 집중력이 떨어져서다. 관람과 연기 모두 고역이다. 그렇다면 야외연극의 관객은 줄어야 마땅한데 그게 그렇지 않다. 나날이 늘어만 가서다. 이 연극축제 관람객은 3년 전 15만 명을 돌파했다. 25회째인 올핸 12개국 51개 단체가 200회나 공연한다.
놀라움이 이튿날엔 수승대로 이어졌다. 50m²나 되는 커다란 거북바위를 감싸 흐르는 맑은 계류가 짙은 초록의 울창한 숲에 안겨 별유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또 물가로는 서원과 정자가 자리 잡았다. 요산요수하는 선비의 유유자적이 풍겨나던 그 아침의 수승대. 나는 계곡의 수려한 풍광에 감동했다. 그러고 계곡을 온통 뒤덮은 원색의 텐트물결에 또 한 번 놀랐다. 매일 저녁 야외극장을 메우는 관객이 설치한 것이다. 이들은 며칠씩 텐트에서 야영하면서 낮으로는 물놀이를 즐긴다. 그러고 해가 지면 가족 단위로 연극을 감상하는 휴가객이다. 이런 향기 어린 휴가문화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 호사를 여기서 가능케 한 이가 있다. ‘연극인 이종일’(58·거창국제연극제 집행위원장)과 어려운 여건에서도 25년간 무대를 지켜온 이 땅의 숱한 연극인이다. 그리고 물을 무대로 펼칠 ‘100인의 햄릿’을 필두로 개막(26일)될 올 연극제는 거창중의 30대 영어교사였던 이 위원장이 산골학생에게 연극을 체험시킨다며 극단을 만든 지 꼭 30년 되는 해다.
거창국제연극제는 그가 야외연극축제의 본고장 아비뇽(프랑스)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기획했고, 1998년 비로소 이 수승대를 무대로 삼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젠 아시아의 아비뇽으로 발돋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수승대로는 역부족이다. 공간이 좁아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창군 전체로 무대를 확대하는 것이다. 거창의 DNA가 된 연극축제가 이 수승대를 뛰어넘어 거창하게 확산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연중 연극을 즐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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