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첫 만남 때 그의 뒷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0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5>국모(國母)

육영수는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절연하다시피 하면서까지 박정희를 선택한다. 67년 4월 30일 공화당 인천유세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대통령 내외. 동아일보DB
육영수는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절연하다시피 하면서까지 박정희를 선택한다. 67년 4월 30일 공화당 인천유세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대통령 내외. 동아일보DB
다음 달인 2013년 8월은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 꼭 39년 되는 해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찬성과 비난이 갈리지만 육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비난의 목소리가 거의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신화가 더 굳어지는 느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육 여사를 생전에 세 차례 만났다. 따뜻하고 반듯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편의 독재를 많이 염려한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 속 야당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김수환 추기경도 동의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육 여사는 청와대 제1 야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면서 약자 편을 들어주셨다. 중앙정보부 차장 김재규 씨에게 전해들은 얘기지만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전달하면서 귀에 거슬리는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인의 아내로서 덕을 잃지 않았으며 사회의 그늘진 곳도 자주 찾아다녔다. 국모(國母)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다”고 추억한다.

실제로 추기경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잡혀간 것을 계기로 74년 7월 10일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하기 2년 전인 72년 2월 박 대통령과 비교적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 기차에서 7시간, 공관에서 4시간을 박 대통령과 함께한 것. 이날 만남을 주선한 이가 바로 육 여사였다.

육 여사는 71년 성탄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박 대통령에게 ‘독재정치’라고 직격탄을 날리자 두 사람 사이를 화해시켜 보려는 배려로 이날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당시 박 대통령은 남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했다. 그런 그분 모습에서 1인 독재체제가 장기화할 것임이 느껴져 우울했다”고 전한다.

어떻든 육 여사는 국민들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에 대해 늘 국민의 입장에서 느꼈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감각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또 남편 귀에 당장 거슬릴지라도 여론을 가감 없이 전했다.

육 여사의 삶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한국적 여인상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지도자의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또 사회지도층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준 시대의 큰어른이기도 했다.

기자는 2008년 12월 육 여사의 삶을 간단한 평전으로 정리해 신동아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당시 쓴 원고를 바탕으로 여사의 삶을 정리해 보려 한다.

흔히 사람들은 육 여사 하면 아름다운 미소와 부드러움을 연상하지만 사실 육 여사는 겉으로는 온화해도 내적으로는 엄격한 자기관리와 절제로 자기 자신에게 매우 혹독한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주변 사람들의 입장을 자기 일처럼 배려했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는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는 배우자를 결정하는 일에서 단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박정희와의 결혼을 결심하면서 형제(1남 3녀) 중에서도 자신을 유난히 사랑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아예 인연을 끊을 정도로 단호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 갑부의 둘째딸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지주였다. 또 미곡상, 금광, 인삼가공업 등 당시로서는 뉴비즈니스사업에 뛰어든 벤처사업가였다. 옥천군에서 가장 먼저 닛산 화물자동차를 소유했으며 그 시절에 무비카메라까지 갖고 있었던 신세대(?)였다.

그러나 그 세대 아버지들의 전형이 그러했듯 완고하고 보수적이었다. 육 여사에게도 ‘여자가 시집이나 잘 가면 됐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면서 고교 졸업 후 전문학교 진학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선뜻 곳간 열쇠를 맡겼다. 둘째 딸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뜻하는 것이었다.

육 여사가 박정희 당시 육군 소령과 처음 만난 것은 전란의 와중이던 1950년 8월 하순경이었다. 외가 쪽으로 친척 오빠뻘 되는 송재천 소위(당시 육본 정보국 근무)의 주선으로 맞선을 본 것. 박 소령이 작업복 차림으로 육 여사 가족이 피란을 가 세 들어 있는 부산 영도의 일본식 2층 집을 찾았을 때의 첫인상을 육 여사는 훗날 어느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모습이 정직하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니까 그 직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미덥고 소박하고 아주 정다운 분이에요.”

박 소령은 맞선 보던 그해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혼례를 올린다.

이날 결혼식에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 씨는 없었다. 전란 중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군인에게, 그것도 여덟 살이나 나이가 많은(박 중령은 서른 넷, 육 여사는 스물여섯) 사람에게 절대로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박정희는 전처소생의 딸까지 둔 이혼남이었다. 육 여사가 아버지와 절연하면서까지 세속적 기준으로 자신의 조건과 한참 못 미치는 배우자를 선택한 것은 다름아닌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다음은 박근혜 대통령이 2000년에 펴낸 ‘나의 어머니 육영수’의 한 대목이다.

“가뭄으로 전 국민이 애를 태우던 64년. 입맛도 잃으면서 절박한 마음으로 농민들과 함께 비를 기다리시던 어느 날, 드디어 비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아버지는 반가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한강변으로 나가 반가운 비를 흠뻑 맞았습니다. 줄기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묵묵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남편을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지도자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고 합니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감동과 함께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육 여사는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 후 내내 남편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영부인이 된 뒤 어느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월남파병 때는 일주일을 두고 고민하시는 것 같더군요. 막상 결정을 내리실 단계에서는 하루저녁에 담배를 네 갑이나 피우신 것 같아요. 한 번 재떨이를 비워 드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꽁초가 많이 쌓였더군요. 주위에서 많이 애를 쓰시고 조언도 하시겠지만 역시 모든 것을 종합하여 판단하시고 결정하셔서 책임지는 것은 이분 혼자이시지 않겠어요. 그런 걸 옆에서 볼 때 무척 안타깝기도 할 뿐더러 그분도 퍽 외로우신 것 같아 보일 적도 있어요.”

3선 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를 사흘 앞둔 69년 10월 14일 오후 육 여사는 기자회견에서 국민투표에 대한 감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감상이랄 게 뭐 있어야죠. 만약의 경우 나야 보따리 싸가지고 훌훌 나가서 가족들과 알뜰하게 살면 그만이지요”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말미에 “앞으로 언젠가 이 자리를 물러나게 되면 그때는 진정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평범한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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