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8>차단기 기둥 곁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0일 03시 00분


차단기 기둥 곁에서
―서대경(1976∼)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어린 아이들은 원인 모르게 앓기도 하고 까닭 없이 섧게 울기도 한다. 그럴 때 옆에서 토닥토닥해 줄 사람, 엄마가 있다. 늘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하지만 엄마는, 일하러 다니거나 친지 집에 방문하러 갈 수도 있고, 일찍 세상을 뜰 수도 있다.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없는 엄마를 부르는 소리. 염소들은 옆에 엄마가 없는데, 항상 “엄마∼” 하고 부른다. 나, 독자는 갑자기 어린애처럼 미열이 오르고 서러워진다.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화자의 자아가 염소의 몸 안에 있다. 화자는 염소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 일종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인간세상의 가두리를 넘어 확장한 것이다. (역지사지란 결국 세상을 좀 더 넓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상상 놀이다). ‘저물어 가는 여름 하늘 아래’ 염소의 눈으로, 그러나 화자의 자아가 본 참으로 ‘염소적으로’ 고즈넉하고 애잔한 풍경이 아득히 나부낀다.

더욱이 시는 반전의 가벼운 충격을 주며 맺어진다.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이라니! 그때까지의 풍경은 현재의 풍경이 아니기에 더 아득하여, 독자를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이끈다. 화자는 염소답게, 풀의 부드러움, 풀의 따스함, 풀의 싱그러움, 풀의 고요함을 자세히 보이면서, 혼자 있는 소년 소녀의 고적함과 서러움을 몽환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허밍하듯 들려준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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