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지구 위에 떠있는 인공위성이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음모에 휘말린 주인공 변호사는 영문도 모른 채 정보기관에 쫓긴다. 금융거래는 정지되고 휴대전화는 추적당한다. 국가안보국(NSA)이 주인공을 쫓는 이유는 NSA가 도·감청을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상원의원을 암살했는데 우연히 촬영된 그 영상물이 주인공에게 전해졌기 때문.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는 이런 상황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리얼 스토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보기관으로 중앙정보국(CIA)이 유명하지만 실제론 NSA가 더 막강하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NSA는 지구 위를 흘러 다니는 모든 신호정보(시진트)를 다루면서도 존재 자체가 베일에 가려 있다. NSA가 ‘그런 기관은 없다(No Such Agency)’라는 뜻이라는 조크가 있을 정도다. 유무선 통신과 암호화된 외교전문, 방사선 신호 등 신호란 신호는 다 여기서 잡는다. 그런데 스노든은 NSA가 프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구글 페이스북 애플 유튜브 등으로부터 범죄 혐의가 없는 일반 이용자들의 e메일 통화내용 사진 동영상을 수집해온 사실을 폭로했다. 하루 도청 건수가 30억 건이나 된다고 하니 그 감시망에 안 걸린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 ‘빅 브러더’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전직 CIA 직원이자 NSA 계약업체 직원인 스노든은 “모든 말과 행동, 감정 표현이 기록되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감시체계의 폭로를 결심했다고 한다. NSA의 도·감청이 9·11테러 이후 시작됐다는 점은 정보 수집 목적이 테러 예방임을 보여준다.
정보기관 출신인 스노든이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지만 그는 국가안보를 위한 도·감청 허용 여부를 국가가 아니라 대중이 판단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개된 정보는 정보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스노든의 생각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의 폭로 이후 알카에다가 통신신호를 바꾸는 등 그의 행동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학교, 주차장, 길거리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여론이 훨씬 높다. 범죄 없는 안전한 세상에 대한 열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생활 침해를 기꺼이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국가안보와 사생활 가운데 어떤 가치가 우선이냐 하는 문제는 절대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과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보기관의 정보가 원래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데 있다. NSA의 경우 과거 에셜론 시스템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다른 나라의 첨단 산업기술을 빼내거나 협상하는 데에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보기관이 안보뿐 아니라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정보 수집을 하는 것까지는 인내한다고 치자. 그런데 실상은 이런 정보가 국익이 아니라 개인과 정권 이익을 위해 사용된 사례가 부지기수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는 분명 중요한 가치이지만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그것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기 힘들다. 스노든이 간과한 점은 현대인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사생활 침해를 덮을 만큼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못 말리는 철부지인가, 정의감에 사로잡힌 열혈 청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감시 받지 않는 권력기관은 언제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일깨운 것은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Quis custodiet ipsos custodes)’라는 라틴어 명제는 NSA뿐 아니라 선거 개입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록 공개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우리 국가정보원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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