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 여사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지만 1950년 말 결혼 이후 1958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는 전셋집을 전전했고, 때로 의식주가 어려운 때도 있었다. 늘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던 그가 본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못살던 시절이었으며 행정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그늘’도 너무 많았다. 절망에 빠진 많은 민초(民草)들은 최고 권력자의 안주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행여 읽어주기나 할까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육 여사는 꼼꼼히 모든 편지를 읽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들은 진심 어린 여사의 반응과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 해인 1961년 7월 3일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여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형을 치르고 나온 전과범이 보낸 것이었다. ‘모범수였는데 나와 보니 일자리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어 막막하다. 손수레 하나만 사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여사는 비서를 통해 신원조회를 해보고 거짓이 아니라는 연락을 받고 그를 의장 공관으로 불렀다. 가족관계는 어떤지, 손수레가 있다면 무슨 장사를 하고 싶은지 세심하게 묻고는 봉투 두 개를 건넸다. 그중 한 개에는 포도장사를 하고 싶다는 그를 위해 손수레 한 대 값과 포도 열 관을 살 수 있는 돈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데 든 왕복 여비와 점심 값을 넣은 것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신문 사회면과 방송을 빼놓지 않고 봤다. 세상 물정을 파악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나름대로 돕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에는 이촌동 판자촌 박옥순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미역국은 고사하고 쌀이 없어 굶어 죽게 생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육 여사는 산모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고는 폐수와 오물로 넘치는 판자촌에서 어렵사리 집을 찾아 몸이 퉁퉁 부은 산모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어린 생명을 위해 직접 밥을 안치고 국을 끓여주었다.
여사에게는 대변인도 공보관도 없었지만 이런 선행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민초들이 보내는 신뢰와 애정은 깊어만 갔고 그 깊이에 비례해 편지도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여사가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돕는 식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삼양동 판자촌을 찾았다. 여사는 판자촌 청년들에게 “국수 기계를 사줄 테니 국수 공장을 해보라”며 조합을 만들 것을 권한다. 며칠 뒤 청년 일곱 명으로부터 “조합을 구성했으며 공장으로 쓸 건물도 물색해놓았다”는 답이 왔다. 여사는 꼼꼼하게 이들을 면접한 뒤 건물까지 확인한 후 약속대로 국수틀과 밀가루를 사주었다. 요즘 ‘협동조합’ 활동이 활성화되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사는 일찍이 이때부터 생활인들의 자활 수단으로 ‘조합’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생전에 여사는 “성의 없는 봉사나 구제는 상대에게 혐오 열등의식 의타심을 길러주어 도와주지 않느니만 못하다. 단지 베푸는 것만이 봉사와 사랑이 아니다. 진심으로 성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복지가 화두인데 육 여사의 ‘진정성 있는’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복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여사는 국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겼다.
1968년 여름 호남지방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폭염이 이어졌다. 대통령은 밤잠을 설치며 초조해했고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여사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대통령 부부는 가뭄이 가장 심하다는 전남 나주로 내려갔다. 논바닥에 양수기가 서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여사가 양수기 쪽으로 가더니 갑자기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쉼 없이 힘주어 밟아도 물이 나오지 않자 여사는 양수기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를 바라보는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같은 해 서울은 집중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서울 잠원동 주민 150가구가 강물을 피해 인근 초등학교로 피신했는데 감기와 배탈 환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여사는 약품을 직접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국립묘지 근처까지 오자 한강은 이미 거대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어둠까지 내려앉고 있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육 여사가 아니었다.
여사는 뱃사공과 배를 수소문해 강을 건너 학교에 도착했다. 영부인이 늦은 밤에, 그것도 배까지 타고 와서 구호품을 전해 주느라 물속을 첨벙첨벙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사는 평생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유신이 선포된 후 반(反)독재 시위가 절정을 향해 달리던 197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를 불쑥 찾았다. 국이라도 따뜻하게 끓여 먹으라고 동태를 건넸다.
여사는 난롯가에 근로자들과 둘러앉았다. 그러자 20대 청년이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다 정치를 잘못해서”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말투도 공격적이었다. 육 여사는 온화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청년의 말을 끝까지 듣더니 청년이 말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하기 힘든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그러나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렇게 모두 비뚤어진 방향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예요. 지금 시민들 애로가 많은 줄은 알아요. 하지만 민원 창구나 정부에서 하는 일도 모두 고충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여사는 며칠 후 청년을 포함해 아홉 명의 근로자를 청와대로 불러 만둣국을 대접했다. 1971년 여사가 날품팔이 근로자들이 30원을 내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를 방문했을 때 적은 소감문은 이렇다.
“(이곳에 있는) 실업자들을 보며 이들이 하루아침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정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반겨주는 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식당 난롯불을 가운데 끼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제쳐놓고 건강한 미소와 순수한 정신을 내게 보여준다. 떠날 때 자주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줄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을 열심히 들어보고 성의껏 그 뜻을 대통령께 전달하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의무에 앞서 커다란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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