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어머니는 늘 ‘특권의식 갖지 말라’ 가르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2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7>나의 어머니

박근혜 대통령이 20대 시절인 1973년 8월 여름휴가지에서 부모님과 함께한 모습. 동아일보DB
박근혜 대통령이 20대 시절인 1973년 8월 여름휴가지에서 부모님과 함께한 모습. 동아일보DB
육영수 여사를 모르고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을 엄하게 양육한 사람은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책 ‘나의 어머니 육영수’에서 어머니의 자녀교육철학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저희들을 키우시며 가장 신경 썼던 일 중의 하나는 행여 대통령의 자녀라는 특권의식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저희들이 편한 생활을 하려 하고 나의 노력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무슨 일을 해결하거나 물건을 갖게 되는 일을 엄하게 금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도 훨씬 엄한 분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간혹 친척들이 해외여행길에 산 것이라며 선물을 가져올 때면 여사는 기뻐하는 자식들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서 친척을 나무랐다고 박근혜 대통령은 회고한다.

‘친척이 돌아가고 나면 저희들에게 단단히 이르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중류가정 정도의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는 자립적이고 적극적이며 또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 부모의 지위에 대한 의타심을 버리고 가난한 한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자각 속에서 겸손하게 자라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장에야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뜻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예 새로운 것, 좋은 것을 가지겠다는 욕심은 단념했었습니다.’

1967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비서가 아들을 일류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제비를 뽑는데 확률을 높이려고 이웃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3명을 동원해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다행히 아들이 뽑혔다며 육 여사 앞에서 자랑을 했다. 그러자 여사가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준엄하게 타일렀다.

“일이 정상적으로 되었으니 망정이지 동원된 아이가 당첨된 뒤에 그걸 물려받았더라면 위법뿐 아니라 인권유린이에요. 아이를 일류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어머니 마음은 다 같아요. 그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식만 넣으려 하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죠?”

며칠 후 다시 육 여사가 비서를 불러 “내가 좀 과하게 말을 한 것 같다”고 사과하자 비서는 펑펑 울어버렸다고 한다.

아들 지만 군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그림숙제를 위해 도화지로 사용할 종이를 비서실에서 얻은 것을 알고는 “종이 한 장도 국가 재산”이라며 돌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기자는 2010년 광복절을 앞두고 박지만 씨와 만나 동아일보 8월 16일자에 인터뷰 기사로 실은 적이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박 씨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의범절을 강조하셨고 거짓말을 하면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잘난 척하지 말고 남 무시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거였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지 말라고도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남보다 좋은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가져 본 기억이 없다. 학교 다닐 때도 될 수 있는 한 시내버스나 전차로 통학했다. 어머니는 늘 ‘언젠가 신당동 집으로 돌아갈 텐데 특별대우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는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서민들의 하소연이 담긴 편지를 일일이 읽고 답장을 하시느라 바빴다”면서 “‘엄마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도 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머니가 재산 모으는 것,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늘 어려운 사람들 이야기뿐이셨다. 서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오실 때는 ‘가슴이 아파 그냥 올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하셨다. 그러면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 계셨고… 생활이나 다른 면에서는 아버지 뜻대로 하셨지만 정치를 둘러싸고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린다거나 아버지가 꼭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야기하셨다. 대개 아버지가 틀리고 어머니가 맞았다.(웃음) 큰소리는 아버지가 치셨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를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 아버지와 국가를 위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특히 나환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자식들에게 ‘너희 어머니 정말 대단해, 대단해’ 하시면서 자랑스러워하셨다”고도 전했다.

실제로 여사의 활동 중에 나환자 돌보기 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을 지냈던 많은 사람들은 나환자와 악수하면서 미소 짓던 육 여사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여사가 나환자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건 1965년 봄이었다. 식목일이 다가오자 몸은 비록 불편하나 꽃을 보며 마음을 환하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을 꽃씨 상자에 담아 나환자 마을에 보낸 게 시작이었다. 그 후 여사는 일반 목욕탕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어주는 등 그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한번은 나환자를 부모로 둔 아이들이 같은 학교 학부형들의 집단행동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환자촌 아이들 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들 지만 군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여사는 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경기 양주군 나환자촌을 찾았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호미를 들고 있는 손도 마디가 떨어져 나간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리며 직접 손수건으로 코를 닦아주었다.

한 소녀가 드링크 한 병을 들고 여사 앞에 놓더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어른들이 미리 연습을 시킨 것 같았다.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이건 서울 가는 차 안에서 마실 테니 냉수를 한 그릇 달라” 하고는 맛있게 마셨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한편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자기들을 벌레 대하듯 하는 게 세상인심인데 영부인이 악수는 물론이요, 자기들이 쓰는 그릇에 담긴 물까지 맛있게 마시고, 뭉개진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으니 말이다.

육 여사 평전을 쓴 작가 홍하상은 “육 여사야말로 국민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만 골라서 한 가장 정치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정치란 것이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의 말은 맞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감쌌고, 늘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으니 육 여사야말로 모든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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