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9>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2일 03시 00분



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고형렬(1954∼)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통치마 아래 반들거리는 정강이
항포돛색 보자기로 네 귀를 묶고
풀다라를 안고 졸고 있었다.
엷은 구름에 바다는 훤한 새벽
불켜고 버스는 북쪽으로 간다.
자식들의 늦은 등교 찻간에서
나는 동해안 어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옆구리에 혹마냥 불거진
흔들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고
나는 해송 달아나는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광 여름 한철을 따라서
어머니는 주문진으로 나가시는가 보다.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
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
저러고 눈만 감은 어머니를
나는 바람결에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해변가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조으는 6척 어머니
짚또아리 드신 장사 같은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고 계신다.
더 위로 위로 오늘은 가시나 보다.


재래시장에서 좌판을 놓고 줄지어 앉은 노점상 열 가운데 여덟은 이런 어머니들이다. 60대, 70대, 80대 아주머니들. 그이들은 왜 그리 몸집도 자그마하신지. 남편이 일찍 죽거나 아프고, 자식도 아파서 며느리는 집을 나가고, 그래서 혼자 밥벌이를 하며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도 계실 테지. 다행히도 시 속의 어머니는 6척 장신의 ‘장사 같은’ 여인이다.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거기에 통치마나 ‘몸뻬바지’가 여성스러움이고 뭐고 다 버리고 억척스레 일하는 어머니들의 일상 복장이다. 생활력 강한 그 어머니가 얼마나 피곤하면 버스에서 잠이 드셨을까.

해수욕장 가까이 사는 어머니들은 여름 한철 민박집도 열고, 동네에서 옥수수 장사도 하고 멍게 장사도 한다. 그런데 동해안 외진 바닷가 마을에 사는 어머니, 매일 새벽에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신다. 북쪽 지방은 남쪽 지방보다 여름이 늦게 와서 빨리 간다. 어머니는 ‘관광 여름 한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부지런히 움직이실 테다. ‘풀다라’ 안에 뭐가 들었을까? 동아줄처럼 질긴 어머니의 삶!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니, 해안을 따라 달리는 버스인가 보다. 바다를 실은 그 버스를 타보고 싶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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