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 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박 잠이 들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쳐 있네/솔바람이 몰고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뭉게구름 흰 구름은 마음씨가 좋은가 봐/솔바람이 부는 대로 어디든지 흘러간대요.’
어릴 적 즐겨 불렀던 ‘흰 구름’이란 동요다. 버드나뭇과에 속하는 미루나무는 높이 30m까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예전에는 가로수로 많이 심었기에 이 땅 곳곳 신작로에서 곧게 뻗은 미루나무를 볼 수 있었다. 한데 생장속도가 빠른 나무들에 점차 밀려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구름이 쉬어가던 그 빛나는 잎새의 풍경도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사이 경제는 좋아졌고 사람들은 ‘웰빙’을 말하더니 다시 ‘힐링’을 말하고 있다.
정일근 시인의 ‘흑백사진-7월’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유년의 추억을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펼쳐낸다. 들판에 드문드문 서있던 유난히 키 큰 나무들, 그 사이로 평화롭게 드나들던 바람에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인 시간. 물장구 치고 노곤한 몸으로 돌아온 아이가 나무 그늘 아래 까무룩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이보다 달콤한 힐링이 또 있을까.
올해 초 타계한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1세대 작가 최민식(1928∼2013)의 렌즈에는 그때 그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1968년 부산에서 촬영한 흑백 사진이다. 물가에서 노는 소년들의 웃음이 더할 나위 없이 밝고 환하다. 너나없이 가난했고 별 다른 놀이기구도 없이 홀딱 벗고 물장구에 열중했던 아이들은 이제 배 나온 중년이 되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휴가철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7월. 그렇지 않아도 주5일 근무제로 바뀐 뒤 늘어난 여가 시간을 낭비 없이 보내기도 쉽지 않은 터라서 본격적인 휴식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 반가우면서 고민도 된다. 돈도 많아졌고 시간도 많아졌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시간에 돈 붓기 역시 덧없는 일이거늘, 값비싼 돈 들여가며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거창한 휴가를 보내는 것은 연중 핵심 목표이면서 과제가 되어버렸다.
말과 이미지로 우리 곁을 찾아온 흑백사진 앞에서 휴식과 여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날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 모니터의 열기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 잠시 전기와 전자 기계의 노예생활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는 것만 해도 휴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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