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장맛비의 ‘소리 공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7일 03시 00분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산사 암자에서 하룻밤 묵었다. 밤새 졸금졸금 빗소리가 달았다. 빗소리는 모주꾼이 술에 젖어들듯 귀에 가랑가랑 감겨 왔다. 마치 젖강아지에게 물린 발뒤꿈치처럼 ‘간질간질’ 자그러웠다. 초저녁엔 “사락사락!” 색시비가 비단신발 끌듯 조심조심 푸나무에 스며들었다. 둥글둥글 도둑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다가왔다. 옹알옹알 옹알이하듯, 끝도 시작도 없이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싸르락 싸르락!” 날비가 갈마들며 나뭇가지 사이를 노닥거렸다. 처음엔 잠결에 싸리비로 마당 쓰는 줄 알았다. 아니, 암소가 풀 뜯는 소리인가. “차르르! 차아아∼” 잘 달군 프라이팬에 밀가루파전 부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칭얼칭얼 연한 빗소리는 귓속을 슬몃슬몃 무시로 들락거렸다.

“우르르! 후두둑!” 한밤중 느닷없이 후려치는 채찍비에 어슴푸레 눈두덩이 들렸다. 얼떨결에 덩달아 등짝이 얼얼했다. “쏴아∼우수수” 뒤란 대숲 바람 소리가 허리를 거의 절반쯤 꺾으며 자지러졌다. “와다닥!” 자개바람은 빗방울들을 사정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우∼욱!” 나뭇가지들도 몸에 내려박히는 빗금눈물에 연신 신음을 토해냈다. 땅바닥 지저깨비들이 부딪치며 콩켸팥켸 억박적박 왁다글왁다글 시끄러웠다.

문득 나뭇가지 위의 노루궁뎅이버섯이 걱정됐다. 빗물에 짓물러 녹아내리지는 않았을까. 수풀떠들썩팔랑나비는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을까.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는 암자 들창 아래 어디쯤에선가 비를 긋고 있겠지.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는 굴뚝 아래에서 비그이를 하고 있을까? 아니야, 거긴 산굴뚝나비 집인걸. 거꾸로여덟팔나비는 어떻게 거꾸로 잠을 자고 있는지 궁금하네. 행여 손잡이가 미끄러워 와장창! 넉장거리는 하지 않았겠지.

장끼 식구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산쑥 먹고 사는 산쑥들꿩은 쑥 덤불 밑에 그대로 있을까. 목도리들꿩은 천근만근 축 처진 목도리에 엄청 답답해할 거야. 뾰족꼬리들꿩은 꼬리가 무젖어 물에 빠진 생쥐처럼 볼만하겠다.

‘꿩 꿩 장 서방, 어디 어디 사나? 저 산 너머 솔수펑이 아래, 우리 집에서 살지. 무얼 먹고 사나? 꼬진 다리 이밥에, 눈 꼽재기 조밥에, 그럭저럭 사네. 누구하고 사나? 꺼병이새끼들하고 넘노닐며 살지.’

새벽녘 자다 깨다, 꿈인가 생신가, 어칠비칠 설핏 잠이 들었나 했더니 “우르르 쾅쾅!” 우레비가 쏟아졌다. “처얼∼철철!” 양동이로 물 퍼붓는 소리, “따다닥! 다닥!” 땅을 쇳덩이로 다지듯 짓누르는 소리, “투다닥! 투닥!” 콩 타작하듯 땅바닥에 뭇매를 치며 휘몰아치는 소리. “꾸르르∼ 콸콸!” 계곡 청석돌징검다리를 거침없이 훑고 지나가는 붉덩물소리. “두두둑! 후두둑!” 떡갈나무 잎사귀에 장구 치듯 내려치는 빗방울 소리….

“구구구우∼ 과아과아∼” 멧비둘기의 뭉툭한 울음에 눈을 떴다. 물안개 아침. 축축하고 진한 나무 냄새가 온 천지에 가득했다. 하늘은 말갛게 벗개었다. “땡그랑 땡 때앵∼” 풍경 소리가 맑게 울렸다. 공양간 아침밥 짓는 연기가 뭉클뭉클 땅바닥에 낮게 깔렸다.

절집에서 비로소 소리를 보았다. ‘관음(觀音)’이 따로 없었다. 요사채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기스락 낙숫물을 바라보았다. 낙숫물은 “주르륵 줄줄∼” 줄기차게 한곳으로만 떨어졌다. 거기에 “데엥∼ 데엥∼” 청아하고 그윽한 범종소리가 버무려졌다. “두둥! 둥! 둥!” 법고(法鼓)의 가죽울림 소리가 섞였다. “두두둑! 두둑!” 운판(雲版)의 말달리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밤낮 눈뜨고 있는’ 목어(木魚)의 ‘침묵의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그렇다. 눈을 감으니 저잣거리의 그리운 소리들이 한꺼번에 물무늬 져 어른거렸다. 속세와 절집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짤랑짤랑! 외양간 워낭 소리, 푸우! 푸우! 황소의 콧김 소리, 우당탕! 골목길 아이들 발자국 소리, 후루룩 훌훌! 비 오는 날 허겁지겁 짜장면 먹는 소리, 딸그락 짤그락! 둥근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 분주한 수저질 소리, 개골개골 맹꽁맹꽁! 무논 가득한 개구리들 경 읽는 소리. 음메∼! 갓 난 송아지 어미 찾는 소리….

지국총 찌그럭! 먼 바다 까치놀을 등지고 오는 고깃배의 노 젓는 소리. 처얼썩 철썩! 바닷가 암자 구석방에서 듣는 파도 소리. 파아! 파아! 동틀 무렵 연꽃봉오리 앞다퉈 터지는 소리. 후두둑 후둑! 찌물쿠는 땀벌창 찜통날씨에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

오호! 절집 하룻밤, 소리공양 한번 참 잘했다. 귀가 순해졌다. 마음이 둥글어졌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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