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승호]백열등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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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1200번이 넘는 실패를 맛보았다. 문제는 필라멘트였다. 구리, 은, 사람의 머리털 등 온갖 소재를 다 써 봤지만 먹통이었다. 그러다 탄소봉을 넣자 녹아내리지 않고 환한 빛을 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이후 인류의 ‘두 번째 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879년 백열등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중간에 포기할 마음이 들지 않았느냐’고. 그가 답했다. “왜 포기하나요. 나는 필라멘트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이미 1200가지 이상 알고 있는데요.”

▷백열등은 그의 1097개 특허 중에서도 대표작이다. “천재란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는 그의 말도 백열등 발명에서 더욱 빛난다. 그는 백열등을 보급하기 위해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에다 고효율 발전기, 배전반까지 만들어냈다. 전구의 성능 개선 실험 중에 발견한 ‘에디슨 효과’(가열된 금속의 표면에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는 20세기에 들어와 진공관에 응용됐다. 이는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 컴퓨터의 발명으로 이어져 전자산업 발전의 토대가 됐다.

▷백열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에디슨의 발명으로부터 불과 8년 후다. 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깔린 경복궁 내 건청궁. 작은 유리등이 켜지고 주위가 환해진 순간 고종을 비롯한 남녀노소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민간에까지 보급된 것은 1898년 서울에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다. 당시에는 수명이 짧고, 자주 꺼지고, 돈까지 많이 들어 ‘건달불’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은 숱한 사람들이 백열등 밑에서 흘린 땀의 결정체다. 전등이 있느냐 없느냐로 도시와 시골이 갈리고, 벽에 구멍을 뚫고 백열등 하나를 달아 두 개의 방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백열전구는 전기는 적게 쓰고 수명은 긴 발광다이오드(LED)램프에 밀려 내년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이연실 ‘목로주점’) 이 노래의 맛과 멋을 아는 사람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물건에 얽힌 애환과 추억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 물건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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