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전 경제부총리는 1964년 5월 취임 직후 경제부처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 등을 불렀다. 서울 세종로에 있던 경제기획원 3층 부총리 집무실 옆의 접견실에서 열린 회의는 오후 9시에 시작해 밤늦게 끝났다. 한국의 경제발전사(史)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녹실(綠室) 회의’의 출발이었다. 이 방의 가죽의자와 양탄자가 모두 녹색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녹실 회의는 공식 경제장관회의와 달리 비공개였고 현안과 관련되는 각료만 참석했다. 그러나 주요 정책을 여기에서 조율한 뒤 공식 회의에 넘겼기 때문에 무게감은 더 컸다. 특히 1964∼1967년 재임한 장기영, 1969∼1972년 재임한 김학렬 부총리는 이 회의를 통해 장관들을 휘어잡고 정책을 추진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86년 기획원이 정부과천청사로 옮긴 뒤 부총리 집무실의 의자는 자주색으로, 양탄자는 회색으로 바뀌었지만 ‘경제정책의 산실(産室)’이란 상징성 때문에 계속 녹실 회의로 불렸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멤버로 추가된 ‘청와대 서별관 회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녹실 회의는 사라졌다.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어제 정부서울청사 18층 간이집무실에서 국토교통부 안전행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금융위원장이 참여한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1차관은 “현 부총리는 앞으로 경제장관회의와 별도로 현안이 있는 장관들과 수시로 만나 경제팀 내 조정과 소통 역할을 강화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현 부총리의 공식집무실은 세종청사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녹실 회의는 주로 서울청사 간이집무실 등에서 열릴 가능성이 높다.
▷과거 녹실 회의를 주재한 경제부총리 중에는 장기영 김학렬 남덕우 씨처럼 온 몸을 던져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이 많다. 시대가 달라져 옛날 같은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는 어렵더라도 녹실 회의 부활이 현오석 경제팀이 제자리를 찾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벌써 경제팀 수장(首長)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일각에서 조기 교체론까지 나오는 현실은 본인은 물론이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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