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32>상수리나무들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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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들아
―이은봉(1953∼)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너희들이 좋구나 너무 좋아 쓰다듬어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그러다가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나, 너희들 들쳐 업는구나 너희들, 나 들쳐 업는구나
우거진 잎사귀들 속, 흐벅진 저고리 속
으흐흐 젖가슴 뭉개지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그렇구나 네 따뜻한 입김,
부드러운 온기 속으로
나, 스며들고 있구나 찬찬히
울려 퍼지고 있구나
너희들 숨결, 오래오래 은근하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껍질들아
껍질 두툼한 네 몸속에서 작은 풍뎅이들, 속날개 파닥이고 있구나 어린 집게벌레들, 잠꼬대하고 있구나
그것들, 그렇게 제 몸 키우고 있구나
내 몸에서도 상수리나무 냄새가 나는구나
쌉쌀하구나 아득하구나 까마득히 흘러넘치는구나


‘상수리나무들아 상수리나무 둥치들아.’ 사랑하는 대상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는 달콤함이여. 화자는 그 이름을 신음처럼 뇌며 상수리나무를 쓰다듬어 보고, 끌어안아 보고, 어화둥둥 들쳐 업어도 본다. 이어지는 화자의 행위는 가위 섹스의 묘사다. 상수리나무가 어찌나 좋은지 그 체취에 녹아날 정도로 화자는 육정에 겹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어떠한 냄새도 기껍겠지만, 싱싱한 상수리나무니 얼마나 물씬 향기로울 것인가.

우리가 알지 못할 땅속과 하늘에 속해 있는, 초연히 서늘한 나무들에게 아름다움과 외경심을 느끼지 않을 이 누구일까.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정화하는 나무. 참 좋아도 행동을 삼가고 조신하게 대하게 되는 나무. 그런데 화자는 상수리나무에 덥석 달려들어 응석 부리듯 몸 비빈다. 어쩌면 화자는 다쳐서 욱신거리는 마음으로 상수리나무들을 만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나 반려동물하고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상수리나무 하나하나에 정을 쏟아내며 화자는 생기를 되찾았으리라. 그리하여 상수리나무한테 받은 ‘쌉쌀하고 아득하고 까마득히 흘러넘치는’ 냄새를 이렇게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무도 사람들 때문에 고생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너무 좋아서 끌어안는 사람은 괜찮지만, 좋은 기를 받겠다고 온몸에 힘을 실어 곰처럼 등짝을 쿵쿵 부딪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담뱃갑에 적힌 문구대로, ‘당신의 매너가 방금 자연을 지켰습니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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