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33>파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2일 03시 00분



파리
―장석주(1955∼)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벽에 앉아 앞발을 싹싹 비비고 있는 파리. 발바닥에 들러붙은 이물을 비벼서 터는 중이시다. 파리는 발바닥으로 냄새와 맛을 느낀다. 그래서 발바닥을 말끔한 상태로 유지하는 게 파리한테는 중요한 일. 그렇거나 말거나 손발이 닳도록 비는 것 같은 그 행태로 인해 파리는 ‘비는 자’, 그러니까 ‘비굴한 자’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누군가의 인생을 파리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잔인하고 차가운 마음에 만정이 떨어지리라.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파리 같은 내 인생!’이라고, 모독과 멸시에 찬 시선을 자기에게 보낸다. 자신을 물어뜯는 화자의 심정이 쓰라리게 와 닿는다. 어둡고 아픈 기억만 우르르 쏟아져, 한평생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깔리는 때가 있다. 나이는 들고, 앞은 막막하고, 기력이 쇠하고 심약해지면 그런 부정적 기운에 휩싸이기 쉽다. 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기만을 바랄 수밖에.

‘평생 비굴하게 산 사람’의 세 유형. 첫 번째, ‘내가 좀 비굴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처자식 고생 안 시켰고, 늘그막에 남한테 아쉬운 말 안 하고 산다. 난 잘 살았다!’ 두 번째, ‘난 잘 못 산 거 같다. 열심히 살아서 기러기아빠도 해 봤지만, 가족의 정도 모르고, 황혼에 이혼도 당했다. 지문이 닳도록 비굴하게 산 끝이 비참하다.’ 세 번째, ‘뿌듯하지도 비참하지도 않다. 그런데 왠지 쓸쓸하고 남루하고 허망하다.’

“좀 비굴하면 세상 살기 얼마나 편한데요”라던 내 어린 친구여, 셋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부디 첫 번째 유형에 속하게 되시기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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