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잠안재우기고문… “눈알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3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4>고행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지하가 집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사진.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투옥된다. 김지하 제공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지하가 집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사진.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투옥된다. 김지하 제공
그의 ‘고행’ 시가 말하는 대로 ‘잿빛 하늘 나직히 비 뿌리던 어느 날’ 김지하는 감방 밖에서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김지하는 ‘뺑끼통(감방 속 화장실을 뜻하는 은어)’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묻는다. 그랬더니 “하재완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상(舍上) 15방(房)에 있던 김지하와 사하(舍下) 17방(房)에 있던 하재완 사이에 통방(通房·재소자들이 창을 통해서 큰 소리로 교도관 몰래 대화하는 것)이 시작된 것이었다.

김지하가 “하재완이 누굽니까?” 물었더니 “인혁당입니더”라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음은 ‘고행’에 소개된 문답이다.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물론 가짜입니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고문 때문이지러.”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김지하가 “저런 쯧쯧” 하고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 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라는 말이 돌아왔다.

며칠 뒤 김지하는 하재완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구치소 내 의무과에서 하는 재소자들의 진찰을 위해 차례를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근처 딴 줄에 앉아 있던 ‘키가 작고 양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약간 고수머리에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왕년에 주먹깨나 썼을 것 같은 사람’이 그를 툭 치며 “김지하 씨지예?” 묻는 것 아닌가. 그가 바로 하재완이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으로 얼마 후 사형에 처해진다.

그날 하재완은 교도관 눈치를 열심히 봐가며 지난번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낮고 빠른 소리로 김지하에게 전했다.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이 김지하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한(恨)이 맺힌 귀곡성(鬼哭聲)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자신이 당한 고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날에는 재소자들과 운동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김지하한테 다가오더니 “김지하 씨지요?” 물었다. 역시 얼마 후 사형을 당하는 이수병이었다. 그는 “어떻게 된 거냐”는 김지하의 물음에 “나라 위해 아무 일도 해보지도 못한 채 이리 끌려 들어와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에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어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지하가 한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인혁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온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로부터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가 보는 앞에서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는 말을 들었던 차였다. 그게 머릿속에 꽉 박혀 있는데 감옥에서 하재완 이수병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니 인혁당이란 것이 틀림없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는 감방 벽에 기대앉아 괴로움과 분노로 몸을 떤다. 그리고 수없이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내 피를 부르고 있는데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거짓을 거절하라고?’

결국 김지하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 옥중수기‘고행’을 통해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 연재를 끝낸 1975년 3월 12일 서울 청진동 한 제과점에서 함세웅 신부로부터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아 달라는 청을 받고 수락했다. 함 신부는 “내일부터 대변인 이름으로 회의의 공식적인 결정들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인 3월 13일 아침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간다. 그의 말이다.

“경찰차 안에서 왜 다시 잡혀가는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었다.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아서일까, 아니면 동아일보에 발표한 인혁당 관계자 발언들 때문일까.”

이유는 후자였다.

1975년 3월 14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13일 서울성북경찰서에 연행된 시인 김지하 씨(34) 일가족 중 김씨는 이날 오후 중앙정보부로 넘겨져 조사를 받고 있으며 처 김영주(30)와 어머니 정금성(53)씨는 귀가했다. 김영주씨에 따르면 13일 오후 4시반경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가택수색영장을 제시하고 집을 뒤져 책과 편지들을 압수해갔다. 영장에는 ①최근의 동아일보 사태(‘고행’ 연재)에 관한 조사를 위해서 ②김씨가 석방된 후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유포 선동했기 때문에 가택수색을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김지하는 중앙정보부 제7국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수배와 구속 도피를 반복해 온 그였지만 이후 그토록 긴 세월을, 그렇게 혹독하게 감옥에서 보내리라고는 그때만해도 예감하지 못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내게 가해진 고문은 잠 안 재우기였다. 입안이 다 헤지고 입술이 부르텄다. 눈알이 뜨거워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잠이 들면 깨우고 잠이 들면 또 깨우고… 눈을 뜨면 눈알 빠진 아버지의 환영이 오갔다. 그리고 환청까지 들렸다. 옆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울음소리는 이어졌다 끊겼다 들려왔다. 어느 날은 또 흐린 전등 불빛 아래 허공 위에 눈알 빠진 아버지의 검푸른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가 옆방에 끌려와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인가?”

취조는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똑같은 질문이 끝없이 반복되다가 대답이 전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바로 그 다른 지점부터 파고들어 다시 시작하는, 이른바 악명 높은 ‘양파 까기’였다.

“네가 인혁당 대변인이냐?”

정보부 요원들은 ‘인혁당이 날조된 사건이라 선전하는 북괴의 활동에 동조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또 강원도 원주 집을 수색해 나온 ‘장일담’ ‘말뚝’이라는 제목으로 써놓았던 희곡 구상메모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려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이적표현물 제작을 위한 예비행위’라고 주장했다. 다시 김지하의 말이다.

“그들은 끝없이 내 손가락에 인주를 발라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서 일주일 동안 잠 안 재우기를 계속했다. 결국 나는 잠을 재워준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그들의 주장에 반쯤 동의하는 형식으로 어물어물 취조를 끝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하#고문#인혁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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