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길어지고 있다. 청와대에선 폭우 피해를 크게 우려하면서도 한편으론 긴 장마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는 분위기가 있다. 냉방기기 사용량이 줄어 전력 수급에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청와대에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창조경제에 대해 진지한 언급을 하다가 “지금 너무 더우시죠”라고 물으며 멋쩍게 웃은 일이 있다. 평소 후드티를 즐겨 입지만 격식을 차리느라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저커버그가 너무 더워보였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전력난 때문에 청와대에 에어컨을 못 틀어 외빈이 더울까봐 대통령이 걱정하고 국민이 에너지 절약을 해야만 전력난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 과연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긴 국가에 걸맞은 건가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고 말했다.
관료 출신인 다른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5월 말 원전 비리 사건이 터져 일부 원전 가동을 중단한 직후 기자에게 “국민에게 면목이 없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했는데…. 겨울도 (전력난 해소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기어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다. 에너지를 절약해 달라는 공익광고를 보면 국민들도 짜증이 난다. 더욱 화를 부채질하는 건 이런 사태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져보면 볼수록 전력 소관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에어컨을 트는 가구나 기계를 가동하는 공장 수는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한데도 전력이 이처럼 부족해지는 동안 한전과 산업부는 뭘 했는가. 전기세를 올리든, 원전을 더 짓든, 댐을 더 만들든 전력 사용량을 잘 파악해 수급 대책을 세우는 게 그들의 몫이다. 전력 수급 대책에 반대하는 국민이 있다면 설득해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도 그들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전력 수급에 문제가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욕먹을 일은 안 하겠다는 책임자들의 무사안일한 자세가 이 사태를 불러왔다.
원전 부품 비리도 이미 오래 전부터 감사원과 언론의 지적이 이어져 왔는데도 감독해야 할 부서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대형 사고가 터졌다.
2010년 12월 완료할 예정이었던 경남 밀양 송전탑은 지금 당장 지어도 8개월이 더 걸려 올해 겨울 전력 수급난은 이미 피하기가 힘들어졌다. 몇 년 전부터 예고돼 온 갈등을 방치한 결과다.
지하철 전동차의 실내 설정 온도는 26도지만 사람이 많이 타면 30도가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해 그야말로 ‘지옥철’이다. 상인들은 실내 온도 단속 때문에 가뜩이나 적은 손님을 끌기도 힘들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의 경우에서 보듯 나라를 위해서라면 힘을 모아 고통을 분담해 왔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왔다. 그런 국민이 합리적인 범위에서 전기를 마음껏 쓰고 싶은 게 잘못인가. 책임져야 할 이들은 과연 땀띠 나게 일하며 참 착한 국민들 고마워나 해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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